기록으로 보는 5·18 민주화운동
기록으로 보는 5·18 민주화운동
  • 김이슬 기자
  • 승인 2019.05.13 00:11
  • 호수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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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 역사적 사건이다.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국가기관이 생산한 자료와 △군 사법기관의 수사기록 △재판 기록 △음모 사건 기록 △시민 성명서 △사진·필름 △병원 치료기록 △국회 청문회 회의록 △피해자 보상 자료 △미국 비밀 해제 문서 등 4,271권의 기록 문서철과 필름 2,017개의 기록물이 포함된 방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 당시 5·18 민주화 운동 현장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군사독재 타도, 민주주의 도래하나

 
4·19 혁명 이후 1961년 5월 16일, 새로 등장한 군부가 무력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정권을 억지로 장악한 군부 중심에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값싼 노동력과 농·어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수출 중심의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으로 개발독재를 단행했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수많은 불균형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국민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자신의 군사독재 체제를 더욱 유지하려 했다. 점점 폭압성을 더해가던 군사독재는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 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쳤다. 부·마 민주항쟁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 사건이다. 결국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에 의해 죽게 된다.
 

전남대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로 향하고 있다.
전남대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로 향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12·12 군사정변’과 ‘5·17 전국 계엄령 확대’

 
박정희 사망 후, 신군부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반대해 주요 야당 의원은 계엄 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발표했고, 거리시위에 나설 것을 계획했다. 이런 시위의 조짐을 감지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1980년 5월 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지상 광장 앞에서 10만여 명 이상의 대학생 및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빠른 시일 내에 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를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그날 밤 신현확 국무총리는 시민들에게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으며,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점으로 ‘전국 계엄령 확대’를 감행했다.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전개됐다. 1980년 5월 14일, 전남대 총학생회 박관현 전 총학생회장을 중심으로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좌) 증파된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우) 금남로에 출현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이다.
(좌) 증파된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우) 금남로에 출현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이다.

  5·18 민주화 운동에 기폭제가 된 전남대 학생들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반하는 신군부의 전국 계엄령 확대는 많은 이들이 시위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신군부는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의 중심 세력이라 여겨 연금하고 구금했다. 또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을 요구하며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진압봉으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유혈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더 거세게 반발하고 시위대 조직을 집단화하자, 계엄 사령부는 광주 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다.
 

  시민과 계엄군 충돌, 민주화운동 본격화

 
1980년 5월 19일 새벽, 추가 배치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늘어난 계엄군에 시위대는 더 분노했고 도심 곳곳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19일 오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은 계림 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도 이날 사망했다.

  1980년 5월 20일 오전,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또다시 진압봉을 휘두르며 이를 저지하려 했다.
이날 오후,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이 깃든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백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나타났다. 계엄군과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가스를 발포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했다. 또한 국군보안사령부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시위를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분노한 시위대가 광주 MBC 방송국에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계엄군 철수, 외부와 단절된 광주

 
가장 먼저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 가 차단됐다. 계엄군은 전남도청 부근에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다. 이에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됐다. 계엄군의 발포는 시신과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으며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 역시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결국, 이날 오후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히 차단하라는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 봉쇄작전을 수행했다.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게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승인됐고, 실탄이 배분됐다.
 

  ‘시민궐기대회’ 개최돼…

 
이후 전남도청 앞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됐다. 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됐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이는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하였다는 의혹으로 불거진 이른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2016년 민중총궐기대회’를 연상케 한다.
 

(좌)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이다. (우) 학생들이 전남도청 앞에서 낭독한 성명서이다.
(좌)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이다.
(우) 학생들이 전남도청 앞에서 낭독한 성명서이다.

  한편 신군부는 연일 전국에 “광주는 현재 치안 부재 상태인 곳”이라고 방송했다. 이에 광주 시민들은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려 계엄군 대표와 만나 협의를 도출해내려 했으나, 긍정적인 결과를 낳진 못했다.
 

5·18민주유공자가 안장돼 있는 망월동 구 묘역이다.
5·18민주유공자가 안장돼 있는 망월동 구 묘역이다.

  계엄군 재진입, 이후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된 5·18정신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 외침은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전남도청을 사수해 계엄군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시민 누구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이날 새벽 4시, 계엄군은 또다시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교전 후 많은 시민들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당시 희생된 많은 이들이 현재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돼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특히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밑거름이 됐다. 5·18민주화운동으로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됐으며, 광주 탄압을 주도했던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해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 92명이 내란·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처벌받았다. 5·18민주화운동으로부터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지고 있으며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항거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이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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