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라, 견뎌라, 그러면 너는 성공할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최근에는 그 열기가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상당히 자주 그리고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예시가 솔개의 선택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40년을 산 솔개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늙어 죽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 살 것인지. 결단을 내린 솔개는 스스로 자신의 부리를 부수고 깃털을 뽑는다. 이 고행을 거친 솔개는 30년을 더 살게 되어 총 70년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선 야생에서 솔개의 실질적인 수명은 25년 남짓이다. 그리고 조류의 부리는 머리뼈에 붙어 자란다. 그래서 일시적인 손상은 재생할 수 있을 지라도 부리 자체가 부숴지면 재생되지 않는다. 떠도는 영상에서 새가 달고 나오는 부리는 인공 부리이다. 깃털은 굳이 뽑지 않아도 계속 털갈이가 일어난다. 야생에서 스스로 부리를 부수고 깃털을 뽑는 새는 없다.

  다른 예시도 많다.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트려 올라오는 놈만 키우며 미꾸라지가 있는 수조 안에 메기를 넣어두면 미꾸라지들이 더 싱싱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 거짓이다.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절벽에 던지지 않고, 수조 안에 메기를 넣어둔다고 해서 미꾸라지가 싱싱해지지도 않는다. 물론 사람들이 이 이야기들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이 말들이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지는 의문이다.

  그 어떤 교훈이 담긴 이야기도 듣는 사람이 공감하지 못하면 공허할 뿐이다. 모든 사람이 솔개나 사자, 미꾸라지는 아니다. 다들 저마다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다른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살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단편적인 이야기에 공감하겠는가?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른데 일률적인 사례를 들고 오면서 열심히 살으라고 설교하는 것은 듣는 입장에서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이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좋고 노력하는 것도 좋다. 상황이 힘들더라도 견뎌야 하는 것은 맞다. 다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 뿐이다. 그 어떤 공감대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설교를 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조금 추하지 않은가?

  일방적인 설교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이 비판 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인 설교를 듣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것은 듣기 싫을 뿐더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줄 수는 없는가? 완전히 방전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행동하기 위한 희망이다. 주변에 힘든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좋은 사람이며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해달라. 차라리 그편이 희망을 주기에는 더 좋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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