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영국 함대의 공격으로 아편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이 영국에 무너진 이후 동아시아는 세계에 문을 열게 되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가 가나가와의 한 항구에 도착하면서 일본도 개항했다. 조선은 이보다 20년도 더 넘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문호를 개방하였다. 동아시아의 개항의 공통점은 모두 위협 속에 마지 못해 열었다는것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서양 세력에 개항을 하였던 반면 조선은 이웃 나라 일본에 개항 당했다는 차이가 있다. 본의 아니게 개항을 하였으나 이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변화를 시도했고,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이를 근대화 운동이라 이름 붙인다.

  근대 국민국가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개념 규정은 상당히 어렵다. 학자들마다 다양하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근대’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근대’없이 ‘국민국가’라는 용어만을 사용하기도 한다. 국민국가라는 것은 신분제적 모순을 극복하고, 공동체로서의 국민의 삶과 기억을 공유하는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근대는 개인이 아닌 국가 중심이기에 이를 극복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불러 일으켰다.

  아무튼 근대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이에 맞서 자강과 개혁을 해야 하는 상황을 가져왔다. 자강이 자명한 시대 상황 아래 동아시아 국가는 차이를 보이며 근대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청은 양무운동으로 청의 제도는 그대로 둔 채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은 처음에 무사를 중심으로 존왕양이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후 서양의 강성함을 알고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메이지 유신을 실시했다. 조선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자강과 개혁을 반복했는데 서양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개화운동과 이들에 적극 대항하자는 위정척사운동이 그것이었다.

  청의 양무운동은 청일 전쟁에 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에 젊은 신사들이 황제를 움직여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했으나 서태후 등 보수파의 반발로 100일을 넘기지 못하였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보수파들은 그를 지키는데만 시간을 보내다 신해혁명으로 청은 멸망하고 말았다.

  조선에서도 갑신정변 등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이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개혁을 이루질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은 오히려 대한제국을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는 역주행을 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정치․사회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 확대를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에 직면하였다. 정부는 이들은 진압하며 1899년 제국헌법을 만들고, 다음 해 제국 의회를 개설하였다. 즉, 형식적으로 국민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실상은 메이지 정부를 구성한 군벌과 재벌이 이끌어가는 정경유착의 국가였다. 결국 일본은 지속적인 전쟁을 추구하는 침략 국가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동아시아는 강제 개항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국민국가를 건설한 나라는 없었다. 그 조차 만들지 못한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왜곡된 형태의 국가는 혼란을 되풀이하든지, 군사적 침략을 일삼는 것으로 패망하고 말았다.

  이를 통하여 국민국가 건설에서 민의의 반영, 인민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100여 년 전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있다. 민주주의는 민의를 수렴하고, 시민을 설득하며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찾고, 도움을 청하면서 동행하는 것이다. 도처에 유형무형의 ‘명박산성’을 쌓고서는 민주국가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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