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는 주제로 진행됐던 기획특별전의 포스터.
지난 2012년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는 주제로 진행됐던 기획특별전의 포스터.

  제국주의와 침략을 이야기하다 웬 홍어 장수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제국주의 침략의 과정에서 동아시아는 침략과 수탈의 상대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문물의 왕래와 교역을 통한 교류가 있었다. 전근대 사회는 국가의 허락 없이 타국을 여행할 수 없었다. 교역도 국가의 허가가 필요하였다. 국가의 틀을 개인이 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한 인물은 여러 나라를 넘나들었다. 그 인물이 홍어 장수 문순득이다.

  문순득은 19세기 초 인물로 오늘날 전남 신안군의 우이도에 살았다. 1801년 문순득은 흑산도에 홍어를 사러 갔다가 표류를 당했다. 그는 육지에서 산 쌀을 주고 홍어를 사다가 파는 상인이었다. 이 지역은 좋은 어장이 예전부터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홍어, 조기 등 특산물이 있다. 그러던 중 바람에 밀려 표류하던 문순득은 11일이 지나서 유구국(오늘날 오키나와)에 닿았다.

  유구에서는 표류민이 발생하였을 때 호송선을 이용하여 푸저우로 보내면 그곳부터는 중국 관리가 베이징에 보내게 되어 있다. 베이징에 머물다 조선의 사절단이 오면 이들을 따라 귀국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귀국을 하려다 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필리핀)에 도착하였다.

  문순득은 10개월 정도를 여송에서 머문 뒤 18038월 여송과 광뚱을 오가는 상선을 타고 마카오에 오게 되었다. 마카오는 당시 포르투갈이 중국의 허가를 받아 교역을 할 수 있었던 지역이었다. 이들은 11일 간의 항해를 거친 끝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문순득은 청의 관리에게 인도되어 조사를 받은 후 3개월 정도를 머물다가 청의 서울이었던 베이징으로 이동을 하였다. 180312월 향산현에 도착한 이후 수로와 육로로 무려 5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베이징에 도착한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중국에 온 사신을 따라 귀국하였다. 베이징에서 한양에 오는 데에는 42일이 걸렸다. 이어 다경포(오늘날 무안)에서 출발하여 만 32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문순득은 표류인으로 현지 관청의 감시를 받았지만 오랫동안 머물면서 현지인과 교류를 하였다. 특히 상인으로서 뛰어난 관찰력을 갖고 있던 문순득은 이를 기록에 남기게 함으로써 당시 문화 연구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 유구의 민속 문화 중 무덤의 모습, 복장과 머리 장식 등에 대하여도 진술하고 있다. 집에 대해서도 네모지고 반듯함, 온돌이 없고 창문이 없음등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또한 닥나무로 만든 종이가 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는 것 등을 자세히 살펴 구술하였다.

  문순득은 여송에서 천주교 성당을 많이 접하였다. 그래서 성당의 건축 양식에 대하여 자세히 구술하고 있다. 성당을 신묘라 하고, 이곳에서 종을 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본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상인답게 여송의 특산물 목면, 초면, 물소, 야자열매 등을 말하고 있다.

  한반도는 3면이 바다로 쌓여 있다. 바다로 눈을 돌리고 우리 안에 있는 것만이 아닌 먼 곳에 있는 것을 찾아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최근 이자스민 전 의원이 정의당에 입당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 안의 것만이 아닌 약자와 타자에 대한 시선을 제대로 가질 때 우리도 동아시아와 함께 호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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