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훗날 역사라 불린다. 올해는 4·19혁명 6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다. 자유를 찾아 이북에서 월남했고 다시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학생의 신분으로 4·19혁명에 동참했던 기억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나는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북한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고, 1950년 6월 25일 아침 남침이 시작돼 우리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다. 이후 서울이 수복되어 홀로 상경해 고등학교를 다녔다. 시간이 흘러 사회가 안정을 찾자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숭실대학교에 진학했고 자신을 더욱 함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전역 이후 친우들의 도움으로 숭실대학교 학도 호국단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위원장으로서 학교에 흐트러진 학생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각 대학의 위원장들은 매주 종로3가 ‘백궁다방’, ‘왕실다방’에 모여 자유를 논했고 부패한 나라 걱정을 했다.

  숭실대학 평양 대선배인 김성락 박사가 학장으로 부임하던 시절, 나는 어느 날 김 학장과 우연히 학교 교정에서 만났다.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서울 삼각동 조모 박사 사무실에 데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나에게 공명선거 학생 투쟁 위원회의 설립을 제의했다. 이것이 나의 인생에서 변환점이 됐다. 당시 나는 매주 각 대학 위원장들과 부패한 정권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와중이었고. 나는 그 제안를 듣고 거절할 수 없었다.

  반정부운동 시작은 삐라(전단)를 뿌리는 것이었다. 당시엔 컴퓨터가 없어 가리방(봉조)으로 글을 쓰고 등사해 삐라를 만들었다. 삐라에 적힌 문구는 명확했다. ‘부정선거 강행하면 백만 학도 일어난다.’ 3월 1일 3·1절 행사가 서울운동장에서 있을 때 1차로 삐라를 뿌렸고 3월 5일 종로에서 2차로 삐라를 뿌렸다. 당시 사건은 서울신문 1960년 3월 6일 자 보도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는 강행됐다. 2월 28일 대구학생사건, 마산 김주열의 최루탄이 눈에 박힌 사건, 삐라가 뿌려졌던 서울의 3·1절 사건과 3월 5일 종로 사건을 통하여 학생 간부들은 왕실 다방에 모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4월 19일 12시 또는 4월 20일 12시 사이렌이 울리면 각 대학 학생들을 모아서 국회의사당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약속된 날짜 전날인 18일, 고려대학교가 먼저 학생을 이끌고 부정과 부패, 부정선거 규탄데모에 선참했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던 중 불량배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했다. 그곳에는 숭실도 있었다.

  나는 종로에서 삐라 뿌린 것이 발단이 돼 경찰을 피해 다녀야 했고 기숙사에 가지 못해 학생회 한광모 총무의 집에서 자고 19일 학교에 나갔다. 그 사이 김순경 군이 숭실대학 학생 70여 명을 데리고 한강을 건넜고, 뒤이어 윤혜득 체육부장이 숭실대학 학생 30여 명을 데리고 한강을 건넜다. 한 총무와 나는 늦게 출발했고 국회의사당에 도착해 학생들과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저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해 먼저 나온 학생들을 만나려 했으나 눈앞에 닥친 것은 희생되고 있는 동지들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였다. 이후 25일 대학교수 300여 명의 데모가 있었으며 26일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4·19 혁명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들의 외침이었다. 이러한 선배들의 희생정신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선배들의 희생은 흔적이 남아 역사가 됐고 우리는 이들의 흔적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삶에서 지나치면 화가 되고 부족하면 욕심이 생기는 까닭에 사회는 언제나 혼탁해진다. 혼탁한 사회를 걷히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의 어려운 시절을 뒤로하고, 수리산 자락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숭실이 있었던 4·19 정신을 후배들이 잊지 말고 이어 가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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