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빠르망(L’appartement,1996) - 아파트의 닮은 방들
라빠르망(L’appartement,1996) - 아파트의 닮은 방들
  • 이지은 교수 (법학과)
  • 승인 2020.05.04 00:55
  • 호수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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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물던 장소를 멀찍이서 다시 보면 왠지 낯설어 보이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아파트는 안에서 볼 때와 밖에서 볼 때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현관 문을 닫고 들어가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온전히 누리던 네모반듯한 공간은, 지상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려 다시 보면 수많은 창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어디가 거긴지 알기 위해 일층부터 하나씩 세면서 올려다보면 갑자기 멀고 생경하게 느껴지는 나의 방.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그리워하는 장소는 파리의 어느 아파트이다. 주인공들은 동경의 대상을 중정(中庭) 너머의 창으로 훔쳐보기도 하고, 지치지도 않고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이렇게 찾아다니는 시간이 너무 길어 정작 달콤한 장면은 거의 없지만 두 주인공이 춤추는 장면은 행복해 보인다. 방에서 춤을 추려고 음악을 트는 여자. 소파에 누워있다가 무심히 손을 올려 여자가 던진 옷을 받아주는 남자. 혼자 춤추던 여자가 끌어당기면 남자도 일어나 함께 춤추다 환희에 차서 뛰어오른다. 빛나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갈등이나 긴장 없이 두 사람이 좁은 방을 공유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물건의 크기나 값어치와 무관하게 하나의 물건에는 하나의 물권만이 성립할 수 있다( 一物一權主義). 그래서 사과 한 알, 소 한 마리, 집 한 채에는 각각 하나의 소유권이 인정된다.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파트 형태의 집단주거시설이 증가하면서 일물일권주의의 예외를 인정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본래 건물이란 동(棟)을 단위로 독립성이 인정되는데, 아파트의 한 동에는 구조상 수 개에서 수십 개의 호실(號室)이 있어서 여기에 각각의 주인을 인정하는 것이 물권관계를 공시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개념이 구분소유권이다. 하나의 건물을 수평 또는 수직으로 나누어 구획된 부분(전유부분)에 대한 배타적 소유(구분소유)를 인정하되 공동이 사용하는 시설(공용부분)은 함께 사용하고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경우에도 일물일권주의를 관철하여 동 단위로 건물을 구분하는 것을 고집한다면 아파트를 사고 팔 때 한 동씩 거래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서울에서 건물주가 아닌 사람은 로또 1등이 되지 않는 이상 평생 아파트에 살 수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지 않은가.

  구분소유권의 개념에 의하면, 아파트 한 호실의 내부, 즉 전유부분은 개인이 각자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공간이기에 처분도 자유이다. 그러나 계단, 엘리베이터, 복도와 같은 공용부분은 다른 이와 함께 공유할 뿐, 그 공간의 관리와 변경은 공동체의 의사에 구속된다. 그래서 아파트에 사는 이상은 계단에 세워놓은 자전거를 한꺼번에 버린다는 공고문으로 위협받아야 하고 입주자대 표회의에서 정한 이상한 빛깔의 아파트 도색도 참아야 한다.

  영화 속에서 리사(모니카 벨루치)의 방은 타인이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배타적 공간이다. 옛 연인도 현재의 정부도 과감히 공동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지나 입구까지 거침없이 올라가지만 닫힌 방문 앞에서는 무너진다. 참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간 남자는 익숙한 향기 속에서 리사를 기다리다가 의외의 여자를 만나는데, 리사와 비슷한 듯 아닌 듯 방을 드나들며 남자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그녀는 사실 리사의 친구이며 오랫동안 남자를 사랑해 왔던 여인이다. 닮았지만 리사가 될 수 없어 괴로운 그녀는 한편으로는 비슷한 괴로움을 남자의 친구에게 안겨준다.

  이 영화는 집중하고 보지 않으면 숨어 있는 실마리들을 놓칠 수 있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시간순으로 정리를 해야 비로소 이해가 간 부분도 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등장인물들이 계속 얽히는 것이나 주인공들의 만남이 아슬아슬하게 서로 어긋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관객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도대체 제정신으로 연애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거절당했거나 혹은 다가가지 못해 더 집착하게 된 사람들이 본인도 어쩌지 못할 마음으로 괴로워하다가 대체가능한 상대를 찾지 못하고 파국에 이른다. 같은 방들이 연달아 이어져 층마다 반복되는 구조의 아파트 안에서 서로 닮은 듯 다른 중첩된 인연으로 불안한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들. 영화의 제목이 라빠르망(아파트)인 것도 그때문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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