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전 열사와 잊혀지지 않은 5·18
박래전 열사와 잊혀지지 않은 5·18
  • 박현철 기자
  • 승인 2020.05.18 14:22
  • 호수 1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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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18일(화)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었던 날로 대한민국 민주화 흐름에서 귀중한 역사로 기억될 날이다. 그러나 이러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잊혀질 위기 속에서 살아왔었다. 1987년 12월 역사적인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권력을 잡은 노태우 정권은 정치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 했다. 물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학생과 민주화 세력 등의 요구로 청문회가 열렸으나 발포명령자 규명 등 완전한 진상 규명에는 실패했다. 이후 노태우 정권은 대대적인 민주화운동 탄압에 나섰다. 이러한 광주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분신을 통해 소리쳤던 본교 출신 박래전 열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박래전 열사의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
박래전 열사의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

  어린 시절의 박래전

  1963년 4월 17일(음력)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의 작은 시골집에서 태어난 박래전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 몸은 건강하지 못해도 개구쟁이로 자란 그는 초등학교 입학했을 무렵부터 담임 선생님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박래전은 초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으나 허약한 탓에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다. 대신 박래전은 글짓기에 능했다. 당시 박래전은 도에서 실시하는 자유교양경진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로 뽑히기도 했으며, 교내 독후감 글짓기 대회에선 빈번히 수상했다.

  1976년 박래전은 서신 중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박래전은 지나칠 정도로 직선적이고 남의 잘못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고지식한 성격 탓에 절친한 친구 없이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박래전은 본인의 형처럼 수원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고, 그들의 뜻을 꺾지 못한 박래전은 결국 형이 다니는 수원의 수성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의 송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박래전 열사 민주국민장 사진.
박래전 열사 민주국민장 사진.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없었던 시대

  박래전의 고등학교 시절은 대한민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박래전이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79년은 그해 10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다음 해인 1980년 5월 18일에는 광주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박래전은 형의 친구들로부터 대학에 가면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더 커다란 세계가 있으며, 특히 본인이 좋아하는 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반드시 대학에 가겠다고 다짐한다. 박래전은 당시 숭전대학교(현 숭실대학교)의 국문과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1982년 박래전은 본교 국어국문과에 합격한다. 

  박래전은 농사를 짓고 싶어 했다. 대학을 나오고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시도 쓰는 그런 삶을 바랐다. 그런 박래전은 대학에 입학하고 동아리인 다형문학회에 들어갔다. 다형문학회에서 박래전은 시를 쓰고 시인들에 대해 배웠으며 밤새워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래전 열사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 김남석(사학·14) 사무국장은 “박래전 열사는 귀농을 해서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지내며 시도 쓰는 편안한 삶을 꿈꿨던 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야 했던 시대는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였다.

  당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돼 계속되는 제5공화국의 폭압과 사회문화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계속됐다. 사회 속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고 있었고 박래전은 그러한 상황 속 ‘우리말 사랑회’라는 운동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게 됐다.

박래전 열사 초상화.
박래전 열사 초상화.

  소심했던 소년, 운동가의 길을 가다 

  우리말 사랑회에 들어간 박래전은 본인의 신념에 대해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동가가 되기에는 박래전의 성격은 소심했다. 당시 거세진 시위의 물결 가운데  박래전은 놓여있었다. 

  9월 어느 날 당시 서울 운동장에서는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 체육대회가 끝나고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었고 박래전은 그 시위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위가 시작되자 박래전은 겁에 질려 도망가고 싶었다. 선배의 만류로 시위에 참여한 박래전은 시위 속에서 조금씩 자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박래전은 학생 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가를 알게 됨과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가를 깨닫게 됐다.

  고뇌를 지속하던 박래전은 어느 날 갑자기 노량진역 근처에서 사복 경찰에게 잡혀갔고 겁이 많았던 박래전은 경찰의 협박에 저항하지 못했다. 자신으로 인해 선배들이 수배되고, 이로 인해 박래전은 죄책감을 느끼고 결국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후 그는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군대를 전역한 후 박래전은 여전히 고향에 머물렀다. 그러던 와중 박종철 서울대 84학번이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이 들은 박래전은 바로 상경했다. 박래전은 결국 다시 시위에 돌아와 열심히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4·19혁명에 버금가는 6월 항쟁이 거리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정치권의 6·29선언을 끌어냈으면 군사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그렇게 성취한 대통령 직선제에서 다시 군부출신 대통령을 만들게 된다. 수많은 희생을 치뤄가며 외쳤던 민주화의 염원이 무산된 것이다. 박래전은 인문대 학생회장에 입후보할 결심을 한다. 박래전은 그 투쟁의 길을 자신의 힘으로 열어젖히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박래전은 78%의 투표율과 53.3%의 지지를 얻어 1988년에 제20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된다. 박래전은 당시 정권에 의해 묻혀가던 광주 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했지만 세상은 냉담했다.

  박래전은 1988년 6월 1일, 자신의 생일날 분신을 통해 당시 꺼져가는 민주화의 열기를 다시금 일으켜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후 1988년 6월 4일 오후 3시경 박래전은 당시 학생회관(현 미래관) 5층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친 후 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했다. 박래전은 한강성심병원에서 전신 80%에 3도 화상 판정을 받고, 6일 운명했다. 박래전의 장례는 민족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운구에는 약 4천 명의 대학생들이 도보 행진으로 함께 했다. 현재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유해가 안장돼 있다. 

  박래전의 죽음 이후 본교 학생을 포함한 서울지역 대학생 2천 5백여 명은 본교 도서관 계단에서 ‘故 박래전 열사 분신 투쟁 계승 및 학살 원흉 처단 실천대회’를 열었으며, 실천대회 중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광주는 살아있다. 끝까지 투쟁하자.”라며 외치다 경찰과 대치해 정문과 후문 등에서 투석전을 벌였다. 장례 기간에는 본교 학생들이 중심이 돼 도서관 계단에서 ‘민중해방열사 박래전 분신 투쟁 계승 서울지역 40만 청년학도 결의대회’를 진행하며 가두 행진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박래전의 투쟁을 기리기 위해 1989년 3월 23일에는 기념사업회가 창립됐고, 현재까지 △추모식 △유고 시집 △약전 발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박래전 열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추모하고 있다. 기념사업회 김 사무국장은 “매년 학내 추모제와 모란공원에서의 추모제를 진행하는데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학내 추모제는 진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김 사무국장은 “재학생들 이런 박래전 열사에 대해 오래 기억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종종 우리는 열사라는 호칭에 가려서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퇴색되기도 한다. 박래전 열사 또한 19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많은 젊은이들 중 하나였고 한편으로는 그 시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다만 시대적인 과제를 끌어안고 고민하고 실천하려 했던 운동가였다.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죽음은 소리 없이 잊혀져 갈 수 있으나 역사를 기억하고자 했던 박래전 열사의 투쟁은 우리들 가슴 속 또 다른 불씨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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