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작 시간에 ‘최초의 기억’에 대한 수업을 하고 있다. 흐릿하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한 감각과 이미지로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서 나아가 당시의 날짜를 연상해 검색한 뒤 눈에 띄는 신문 기사를 찾아 연결해 짧은 글을 쓰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순간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순간의 조우를 통해 사실과 허구, 기억과 서사의 의미를 되묻는 글쓰기 과정을 체험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떠올리는 최초의 기억은 정말 사실에 닿아 있을까, 우리의 사적인 일상은 과연 세계적 사건과 무관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인생 최초의 기억뿐 아니라 어떤 사람과 공간에 대한 기억도 우리에겐 남아 있다. 2011년 1학기 강의를 끝으로 숭실대를 떠난 뒤 십 년 만에 돌아와 가장 먼저 가고 싶던 곳은 중앙도서관이다. 이십 대 후반, 뒤늦게 신입생으로 입학해 800번대의 문학책들을 다 섭렵하겠다는 허세 가득한 문학적 야심과 자발적 고독에 빠져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보란 듯이 책을 쌓아 두고 있었지만 읽기보다는 멍 때리거나 되지도 않는 글들을 끄적거리다 알 수 없는 우울감과 자괴감에 빠져 천천히 도서관 내부 계단을 내려오곤 했다. 계단 로비에 걸린 렘브란트의 말년 자화상을 쳐다보며 나의 불안한 미래를 투영하고 늙음과 죽음을 감지했다. 그 후 학교를 떠나서도 문득 도서관의 렘브란트 자화상을 떠올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들어가 그 자리에 놓인 그림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렘브란트 자화상은 어디로 갔을까.

  렘브란트가 내면 심리가 투영된 시각적 공간 기억이라면 학교 앞에 있던 식당 ‘시골집’은 맛과 냄새에 대한 공간 기억이다. 무뚝뚝하지만 인심이 담긴 시골집 할머니의 커다란 돈가스를 오랜만에 먹고 싶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더듬듯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골집은 오래전 사라졌다고 하고, 그 식당을 기억하는 학생들도 없었다. 대학원생과 면담을 하다 우연히 시골집 할머니가 식당을 떠나며 남긴 글이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몰라 검색하니 할머니가 남긴 글 사진이 포스팅되어 있었다. 주름지고 투박해 보이기만 했던 할머니의 손이 남긴 강하고 아름다운 글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덕지덕지 붙여 놓은 초록색 테이프마저 할머니가 남긴 메시지처럼 보였다. 우리가 눈을 깜빡거릴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글이 있다. ‘여러분과 함께한 긴 세월 참으로 행복 했읍니다.’ 할머니는 썼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억했다. 

  내가 처음 도서관에서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본 날은 언제였을까, 할머니가 가게 문을 닫고 낡은 탁자 위에 흰 종이를 펼쳐 놓고 매직으로 또박또박 우리에게 안녕과 안부의 글을 쓴 날은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날 세상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지만, 어떤 시간은 영원히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의 힘이, 기억의 공백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악담과 왜곡과 부정의 말들이 우리의 표정과 마음을 혼탁하게 만드는 시대, 빈 기억의 공백을 더 많은 사람이 빛나는 언어로 채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