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을 아십니까? 구로공단은 산업화 시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단지대였습니다. 어린 여공들이 가발을 만들고, 옷감을 만들어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끌던 곳이지요. 동시에 야근과 저임금, 그리고 벌집으로 상징되는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대표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이름부터 구로디지털단지라는 매끈한 모양새로 바뀌었고, 수많은 고층 건물이 가득한 최첨단 산업의 메카로 변신하였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산업화 시절의 아픔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랬던 것인데 지금 한 작가가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여전히 그곳은 열악한 삶이 계속될 뿐이라고 말하는 작품을 당당하게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려는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 (AXT , 202121.3/4)입니다. 미조는 수영 언니의 추천으로 면접을 보러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회사에 갑니다. 차장이라는 분은 소압박 면접에서에서 미조에게 다섯 번이나 회사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네요. 미조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인이 된 것처럼 그 질문에 공손히 답을 합니다. 그렇다고 미조가 취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회사에서 미조와 같은 경리직 사원은 너무나 쉽게 구하고 버릴 수 있는 상품에 불과하니까요. 미조가 거의 모든 회사에서 들어온 말은 “너를 자르고 신입을 뽑아도 급여정산 정도는 충분히 맡길 수 있다. 너는 그걸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조를 추천해준 수영 언니는 구로디지털단지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수영 언니는 회사에서 변태적인 성인 웹툰을 그리느라 디스크와 탈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수영 언니가 일하는 곳은 ‘회사이자 병원’이라고 할 만큼 노동강도가 세며, 수영 언니와 같은 회사의 ‘어시’(assistant)들은, 엎드려 울거나 우울증 약을 먹을 정도로 힘들어합니다. 미조는 수영 언니에게 그 일을 그만두라고 권하지만, 수영 언니는 “어딜 가나 똑같다는 거야. 다 마찬가지야.”라는 말을 할 뿐입니다. 미조가 어디 가나 싸구려 물건으로 취급받는 것처럼, 수영 언니도 그 고통스러운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다 마찬가지라는 말”은 어느새 우리 시대 청년들의 “말버릇”이 되어 버렸네요.
  「미조의 시대」에서 ‘다 마찬가지라는 말’은 이 시대 노동자들의 개별적 삶은 물론이고 시대를 뛰어넘어 수 십 년 전 구로공단 여공의 삶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구로의 역사가 담긴 사진 속의 여공과 수영 언니가 닮아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암시됩니다. 수영 언니는 성인 웹툰을 그리는 일이 사진 속에서 가발을 만들고 있는 젊은 여성처럼 “시대가 요구하는 걸 만들고 있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수십 년의 시대를 격한 젊은 두 여성이 가발을 만들거나 성인 웹툰을 그리게 하는 ‘시대의 요구’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돈’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시대가 가발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가발을 만드는 거고, 시대가 성인 웹툰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그걸 만드는 거야.”라는 수영 언니의 말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돈에 따라 무엇이든지 해야만 하는 비극은 시대를 뛰어넘어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 작품에는 아직 한 명의 청춘이 더 남아 있습니다. 미조의 오빠인 충조는 10년째 공시생으로 살고 있는데,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과 연락을 끊었습니다. 지금 오랜만에 돈을 빌리려고 미조에게 연락을 했네요. 충조는 전국에 있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청년입니다. 이런 충조는 최근에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맛집을 찾으러 간 지역의 가장 큰 공단을 찾아가 구경하는 것입니다. 충조에게 그 웅장한 공단은 노동자들의 삶과는 무관한 멋진 스펙터클(spectacle)일 뿐입니다. 이러한 충조의 모습은 그 무책임한 부정성까지 포함하여 우리 시대 청년이 보여주는 슬픈 초상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미조의 시대」 라는 제목부터 그리 낯설지가 않네요. 여성의 이름에 시대를 붙인 소설명으로는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세대』, 1973.7.)가 유명했지요. 식모, 버스 차장, 창녀로 전전하다 결국 불에 타 죽는 영자는 그 시대가 만들어 낸 극한의 희생자였습니다.
  햇빛은 구경할 수도 없는 반지하 방에서 셀 수도 없는 이력서를 쓰고, 가학적 성욕으로 범벅이 된 성인 웹툰을 그리느라 탈모가 된 미조나 수영 언니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영자’는 아닐까요? 오충조까지를 포함한 미조와 수영 언니를 그 시대연속 선상에서에서 사유하게 만드는 그 괴물은 무엇일까요? 분명 글은 끝났는데, 진짜 글은 지금부터 써야만 할 것 같은 이 불안은 또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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