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연의 「마지막 로그」(『단어가 내려온다』, 허블, 2021)는 2078년이 배경인 소위 SF(science fiction)입니다. SF란 일상적인 시공간을 벗어나 여러 비현실적인 일을 과학적으로 가상하여 그린 소설을 말하지요. 인간의 과학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여 감히 신에게까지 도전하게 된 근대의 산물입니다. SF는 타임머신, 외계인, 우주여행, 인조인간 등의 주제를 다루며, 대표적인 고전으로는 J.베른의 『해저 2만리』나 H.G.웰스의 『타임머신』, 『우주전쟁』 등을 들 수 있지요. 서구에서는 상당히 인기를 끄는 장르임에도 한국문학에서는 오랫동안 주변적인 장르로서 경시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SF를 ‘공상과학소설’로 번역하여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원어의 어디에도 ‘공상’에 해당하는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굳이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한 ‘공상’이라는 말을 앞에 덧붙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에 밀착된 전통적인 ‘노블(novel)형 소설’을 중시하는 한국 문학계의 통념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SF 앞에 ‘공상’이라는 말을 따로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SF가 보여주는 상상력이 허무맹랑한 ‘공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폭과 깊이를 확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정연의 「마지막 로그」는 SF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 이상의 현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마지막 로그」는 인간과 안드로이드(Android,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과 닮은 행동을 하는 로봇)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입니다. 작가는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별하는 본질적 기준으로 “사전에 주입된 프로그램 혹은 누군가 정해놓은 바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일련의 시도”를 의미하는 “자유의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지금처럼 파시스트적 가속도로 발전해 나갈 때, 과연 ‘자유의지’는 로봇이 아닌 인간만의 전유물일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이 작품의 포인트입니다.

  안락사를 전문으로 하는 시설 실버라이닝에 이제 겨우 40살이 되었을 뿐인 인간 A17-13이 나타납니다. 중학교 때부터 희귀병을 앓아온 그녀는 이제 당뇨망막병증으로 시력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고, “내가 오로지 나인 상태”로 인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한 것입니다. 베테랑 안드로이드인 38b1489X는 A17-13이 안락사할 때까지의 일주일 동안 그녀를 도와줍니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마지막 로그」의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죽음까지 불사하는 진정한 인간이고, 로봇은 그 영웅적인 인간을 도와주는 충실한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서사가 전개될수록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는 심하게 흔들리네요. 인간 A17-13은 자기를 지키겠다는 처음의 생각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릴 뿐입니다. 그렇기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지만, 이를 곧 뿌리치고 맙니다. 마치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기계처럼 말이죠. 애당초 ‘내가 오로지 나인 상태’, 즉 불변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 따위는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아닌 것으로 변해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 A17-13은 ‘나’라는 존재 자체의 파괴라는 역설적인 선택까지 한 것이겠지요.  오히려 변화하는 존재의 리듬과 감각에 충실한 것은 안드로이드인 38b1489X입니다. 38b1489X는 본부로부터 “매뉴얼을 따르지 않는 자체적 판단의 실행이 감지됨”이나 “클라이언트와의 상호작용보다 직면 과제에 집중할 것”과 같은 에러 메시지를 받을 정도로, 자유(自由)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 A17-13이 시종일관 A17-13으로만 불리는 것과 달리, 안드로이드 38b1489X에게는 ‘조이’라는 이름까지 있었습니다.

  2078년이라는 시점에서 ‘자유의지’를 기준으로 인간과 로봇을 구분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로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A17-13이 끝내 안락사를 선택한 것은 38b1489X가 A17-13을 죽음으로 이끌고자 했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지요. 인간은 어느새 로봇의 ‘자유의지’에 종속된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동시에 이 작품에서는 신의 자리까지 넘보려는 인간의 만용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은은하지만 강렬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38b1489X가 반골 기질이 농후했던 담당 개발자가 심은 일종의 버그로 인해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도 “돌연변이의 결과물”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 작가의 입장이니까요.

  처음 말한 것처럼, SF는 ‘공상과학소설’에서 ‘공상’을 뺀 ‘과학소설’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오정연의 「마지막 로그」가 보여주는 존재에 대한 진지한 통찰은 이제 SF가 장르로서의 ‘과학소설’을 넘어 우리 시대의 ‘진짜 소설’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SF가 한국문학에 가져올 희망의 빛을 두 손 모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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