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한 단면을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함축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1871]. 프로이센에게 패배하여 더 이상 프랑스어 수업을 할 수 없게 된 아멜 선생의 슬픔과 그저 들판에서 뛰어 노는 게 좋은 프란츠의 반성이 이어지며 한 편의 시처럼 그려진 소설이다. 또 하나의 ‘마지막’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1905]. 죽음을 눈 앞에 둔 여류 화가 존시는 창밖으로 보이는 담쟁이의 마지막 잎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게 된다. ‘저 이파리만 떨어지면 나도 죽겠지?’라고 절망한 존시. 비바람 세차게 불던 밤을 지내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그녀는 다음 날 아침 담쟁이덩굴의 마지막 ‘잎새’가 여전히 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고, 기력을 되찾았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던 술주정뱅이 화가 베어먼의 마지막 역작(力作)이 었다. 밤새 차가운 비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담장에 붓으로 잎사귀를 그리며 폐렴에 걸린 베어먼. 그는 존시가 소생한 이틀 만에 죽었다. 또 다른 ‘마지막’은 이어령의 「마지 막 수업」[2021]. “너 존재했어?/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167쪽]라는, 뒷골 서늘해지는 질문들은 분명 이어령이 내지른 깨우침의 ‘할(喝)’이다.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은 ‘절망과 반성’을 이어주는 희망의 끈이었다. 「마지막 잎새」의 ‘마지막’은 죽음과 삶을 이어주는 희망의 끈이었다. 격동의 세월을 요리하며 살아온 인문학자 이어령의 ‘마지막’은 준열(峻㤠)한 죽비가 되어 우리의 등짝을 후려친다. ‘마지막’은 비참하지만, 상황에 따라 비장하기도 하다. 비참을 극복한 승화(昇華)의 아름다움이 비장이다. 한시적 존재인 인간에게 ‘마지막’은 얼마나 처절한 말인가. 숭고한 정신을 갖추고 있기에 비참한 패배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수업」들과 「마지막 잎새」의 ‘마지막’은 승리와 소생의 비장함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마지막’은 최고로 순수하고 정말로 희망적이며 가장 정화된 슬픔의 순간이다. ‘마지막’에 이야기 되는 모든 것들은 듣는 자 모두 기억해야 하고 지켜야 하는 금언인 것도 그 때문이다.

  내 ‘숭실 시절’이 바야흐로 ‘마지막’ 학기에 접어 들었다. 숭실에서의 35년, 70학기가 꿈 같이 지났고, 이제 마지막 ‘0.5년-71번째 학기’를 맞은 것이다. 고작 2~3분이면 헤아리고도 남을 ‘35.5년-71학기’의 ‘마지막’을 35년 만에 마주하게 되었다. ‘마지막 학기’가 끝나면,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난다. 대학의 ‘마지막’은 대학 밖의 ‘처음’으로 연결될 것이다. 숭실에 오기 전, 지방 K대학 부임 첫날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주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숭실에 부임할 때도 그렇게 했다. 나태와 유혹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학문의 바다에 빠질 수 있게 해주십사는 기원이었다. ‘마지막’ 학기 첫 날 강의실로 가는 동안에도 다음과 같이 기원했다. “주여, 그동안 보살펴 주심으로 행복하게 살았고, 오늘 그 여정의 ‘마지막’에 도달하였나이다. 이 ‘마지막’이 대학 바깥의 ‘처음’으로 건너가는 튼튼한 징검다리 되게 하여 주소서. 그 ‘처음’이 흡족한 ‘마지막’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라고. 언젠간 만나게 될 ‘마지막’을 위한 간절한 기원이었다. ‘마지막’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되는, 완성의 순간이다. 나는 지금 그 순간을 향한 발걸음을 조심스레 내딛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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