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조선(朝鮮)을 ‘기록의 나라’라고 부른다. 기록의 가치를 중시하여 수많은 기록물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물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안전한 보존·관리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기록물 중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들 수 있다. 한 왕대의 실록은 그 왕이 서거한 후 다음 왕대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선왕(先王) 때의 각종 자료들을 바탕으로 중요한 내용을 선별·정리하여 편찬하였다.

  실록 편찬에서 이용된 여러 자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정기(時政記)와 사초 (史草)이고, 시정기와 사초를 작성하는 관원이 사관(史官)이다. 사관은 왕이 가는 곳 은 어디든지 수행하며 국정의 모든 사항을 기록했는데, 그 기록물이 바로 사초이다. 사초 중 객관적 사실을 기록한 내용은 여러 관청의 업무 기록들과 함께 시정기로 정리되어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로 사용되었다. 한편 사관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기준으로 국정의 잘잘못과 국왕·관료들의 선악을 판단하고 평가한 내용도 사초에 기 록했는데 이를 사론(史論)이라고 한다. 사초 중 사론 부분은 시정기에 포함하지 않 고 사관 개인이 보관하다가 실록 편찬이 개시되면 실록청에 제출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로 이용하도록 했다. 사론 내용이 미리 알려지면 정쟁이 일어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 기록의 생명은 정직함과 공정함, 즉 ‘직필(直筆)’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관이 사실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기록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했다. 조선에서는 사관이 작성한 사초와 이를 바탕으로 편찬된 실록을 다른 사람들이 열람 하거나 수정하는 것을 철저히 금했는데 여기에는 왕이나 고위 관료들도 예외가 아니 었다. 심지어 사초를 작성한 사관 본인도 한번 작성한 사초를 다시 고칠 수 없도록 했다

  조선에서는 사관의 자격 조건으로 ‘재행(才行)의 겸비’를 강조했다. ‘재(才)’가 역사 가로서의 학문적 능력이라면, ‘행(行)’은 바른 인격과 행실을 의미한다. 사관은 사론을 통해 국정의 시비를 평가하는 존재였으므로 사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인격적 성숙과 도덕성이 필수적이었다. 조선에서는 사관 임명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부정·비리 사건에 연루되거나 사적 이해관계로 물의를 일으킨 사람은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연루된 사실만으로도 사관 임명에서 배제하였다. 또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장리(贓吏), 즉 뇌물·횡령 등의 경제 범죄를 지은 관리는 그 자손들도 사관에 임명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가혹한 연좌제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깨끗하고 공정한 인재를 사관에 임명하기 위한 고민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 고민이 조선을 조금은 더 건강한 나라로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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