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는 21세기 한국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등단한 이후, 20여 권의 창작집과 장편소설을 발표한 김연수가 구축한 문학세계는 한두 마디로 정리하기 힘들만큼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정밀한 구성,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학, 감각적이면서도 지적인 문체, 역사에 대한 관심 등을 김연수 소설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텐데요. 여기에 덧보태 소통과 공감에 대해 집요한 탐구 역시 김연수만의 문학적 인장(印章)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김연수의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도 인간 사이의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인데요. 기존의 작품과 다른 것은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이로부터 비롯된 역사에 대한 낙관이 두드러진다는 점입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정리하는 ‘내’가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은 “고민은, 늘 똑같지요. 그냥 불안해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안해 하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다음 150년 동안 세상은 엄청난 진보를 이룩할 걸세.”라는 희망적인 답변을 합니다. 이 소설의 핵심은 할아버지가 지닌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불안 대신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시공을 달리 하는 바르바라들이 서로 소통하며 정신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는 네 명의 바르바라가 등장하는데요. 이들은 시공간 상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정신을 나누고 이어받습니다. 

  첫 번째 바르바라는 이교도인 왕의 딸로 태어나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집하다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성자(聖者)입니다. 두 번째 바르바라는 마카오 유학에서 돌아온 최양업 신부가 1850년에 스승께 써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소녀입니다.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한 결심을 투철하게 지켜 나간 바르바라는 1850년 9월 23일에 열여덟의 나이로 죽습니다. 세 번째 바르바라는 할아버지의 여동생입니다. 1949년 북한 정권이 수도원을 몰수하고 독일인 신부들을 체포할 때, 바르바라는 수녀원을 접수하러 온 자들에게 완강하게 맞서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이 일로 4대째 내려오는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걷던 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그만 환속하고 마는군요. 네 번째 바르바라는 아직 지구별에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이전 바르바라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언젠가는 오고야 말 미래의 존재입니다.     

  할아버지는 위에서 말한 세 명의 바르바라들이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힘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데요.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자신의 할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통해 최양업 신부와 바르바라를 아는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논리로 지금 열 살의 아이는 할아버지가 그러했듯이, 1940년대의 일을 이야기하는 할아버지를 통해 그 때의 일들을 단순한 역사가 아닌 생생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200년 정도의 시간은 가볍게 뛰어 넘을 수 있는 존재이며, 육체의 죽음과는 무관한 정신의 기나긴 삶을 통해 희망의 불씨는 사라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그 어떤 끔찍한 일에도 “오직 연민과 사랑이 있을 뿐, 여기에 비관이 깃들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확신은 이러한 논리가 뒷받침된 결과입니다. 

  할아버지는 오랜 경험과 성찰을 통해,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군요. 영원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고통과 억울함이란 티끌같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할아버지는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결심하며, 이러한 결심은 단순히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행동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할아버지는 1993년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반세기 전 신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왔던 정치보위부의 간부를 우연히 만납니다. 그 사람은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30여년 만에 출소한 비전향장기수입니다. 그 남자는 할아버지의 여동생 바르바라의 죽음에도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자로서, 할아버지에게 “게으르고 쓸모없는 수녀들이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유일한 길은 수도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 혼인하는 일이라고 조롱”까지 하였습니다. 남자가 준 충격과 상처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할아버지는 그 이후로 한 번도 그 목소리와 얼굴을 잊은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 그리고 또 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하고 그를 용서합니다. ‘2100년(미래)의 바르바라’를 생각하며 원수를 용서한 할아버지를 떠올린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결코 어두운 곳만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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