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름답다고만 치부했던 제주에는 환경 문제와 가슴 아픈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제주에서 ESG와 역사를 찾는다고 하면 어떨까. 본지는 지난 2일(일)부터 5일(수)까지 제63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진행됐던 제주 교육 기행 ‘제주를 돌아봐’에 동행해 ESG와 역사를 찾아봤다.

첫째 날, 제주 ESG: 친환경 

  제주에서 ESG를 찾다
  ESG는 △Environmental(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 구조)의 첫 글자를 조합한 단어로, 기업이 △친환경 △사회적 책임 △지배 구조 개선을 통해 지속 가능한 경영을 달성하기 위한 핵심 요소를 뜻한다. 해당 단어는 지난 2004년 사회 책임 유엔 기관 ‘유엔 글로벌 콤팩트(UN Global Compact)’가 작성한 △환경 △사회 △지배 구조 권고안 보고서인  ‘Who Cares Win’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후 지난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 중요해짐에 따라 ESG가 주요한 논의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ESG 환경 요소에는 △기후 변화 △탄소 중립 △환경 보호 등이 관련 주제로 제시된다. 이 중 탄소 중립과 환경 보호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제주에서 ESG를 찾았다.

꽃마리생활협동조합 이소진 대표가 친환경 제품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꽃마리생활협동조합 이소진 대표가 친환경 제품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친환경 제품에서 ESG를 찾다
  제주 교육 기행 첫째 날에는 ‘꽃마리협동조합’ 이소진 대표의 친환경 교육이 진행됐다. 제주에서 운영되는 여성 협동조합인 꽃마리협동조합은 친환경 원료로 세제와 샴푸 등을 생산하고 용기까지 재사용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이날 이 대표는 “제품만 친환경적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담아내는 포장과 생산 과정도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친환경 교육을 시작했다.

  먼저, 제주 쓰레기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대표는 현재 제주의 최대 현안이 쓰레기 문제라고 설명했다. 관광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제주 내 쓰레기 배출량이 도 자체의 쓰레기 처리 수용량 이상으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제주 1인당 쓰레기 배출량은 2kg으로 전국 1인당 생활 쓰레기 평균 배출량인 1.2kg보다 더 많다. 이는 각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치다. 이에 이 대표는 “제주 인구에 비해 많은 쓰레기가 배출되는 상황을 보면서 쓰레기 없이 살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천연 세제에 대한 교육이 이어졌다. 하루 동안 사용하는 물의 60%가량이 세제를 세척할 때 사용된다고 한다. △설거지 △세탁 △목욕 등 세제를 씻기 위해 하루의 물 사용량 절반 이상이 사용되며 세제와 함께 배출되는 현실이다. 여기서 문제는 세제에 있는 ‘합성 계면 활성제’다. 합성 계면 활성제는 세제의 향과 세척력을 강화하기 위해 쓰인다. 하지만 피부를 자극하고 자연 분해가 어려워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는 단점이 있다. 합성 계면 활성제 대신 ‘순 식물성 계면 활성제’를 넣으면 환경 보호에 좋다. 순 식물성 계면 활성제는 자연 분해가 되는 동시에 피부 자극도 줄일 수 있는 효과를 가진다. 헹굼 시 합성 계면 활성제보다 순 식물성 계면 활성제가 물 사용량도 적어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마지막으로 용기 재사용에 대한 교육도 이어졌다. 이 대표는 “친환경 세제를 만들고 담을 때 플라스틱 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며 “대용량 ‘벌크 리필 시스템’을 만들어 용기를 재사용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꽃마리협동조합의 벌크 리필 시스템은 친환경‧재활용 제품을 판매하는 ‘제로 웨이스트’ 매장 250군데에서 ‘벌크(Bulk)’ 용기를 배치해 세제 내용물만 구매하도록 한 운영 체계다. 벌크는 개별 포장이 돼 있지 않은 큰 용기를 뜻한다. 이에 소비자는 다른 용도로 사용했던 플라스틱 통이라도 제로 웨이스트 매장에서 세제를 다시 담아 구매할 수 있다. 매장에서 다 쓴 벌크 용기를 꽃마리협동조합에 반납하면 해당 용기를 세척하고 다시 제로 웨이스트 매장으로 보내 용기 재사용의 선순환을 이루는 구조다. 이러한 벌크 리필 시스템을 통해 개별 플라스틱 용기를 약 40개개 줄일 수 있다. 이 대표는 “생산할 때 생산 효율이 높아지고 플라스틱 용기를 줄일 수 있다”며 “소비자들에게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장점이 생긴다”고 말했다.
 

제주 교육 기행 참가자들이 친환경 샴푸를 만들고 있다.
제주 교육 기행 참가자들이 친환경 샴푸를 만들고 있다.

  교육이 끝나고 꽃마리협동조합과 함께 친환경 샴푸인 ‘로즈메리 천연 샴푸’를 만들어 보는 체험이 진행됐다. 강사의 설명이 자세해서 더욱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우선 점도제인 ‘구아클로라이드’를 점성 액체인 ‘글리세린’에 넣고 녹여준다. 그 뒤 ‘로즈메리 워터’를 넣고 적절한 점도가 생기도록 섞어준다. 이어 코코넛 오일에서 추출한 천연 계면 활성제 ‘LES’를 넣고 저어준다. 3가지의 천연 추출물과 제주산 허브 오일을 담으면 완성이다. 이날 교육을 들은 최수정(산업정보‧19) 씨는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한 생활에 대한 인식을 높일 기회였다”며 “이런 활동이 계속 이어지면 더 좋은 환경과 미래를 위한 노력이 될 것 같다”고 전했다.

둘째 날, 제주 ESG: 비치 클린

  제주 바다에서 ESG를 찾다
  제주 교육 기행 둘째 날에는 제주 바다 환경 단체인 사단법인 ‘세이브제주바다’ 현주영 대표의 해양 환경 교육이 진행됐다. 세이브제주바다는 매주 제주 바다 정화 활동을 이어가며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을 진행하는 환경 단체다. 이날 현 대표는 ‘바다 쓰레기와 나’라는 주제로 교육을 이어갔다.

세이브제주바다 현주영 대표가 해양 환경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세이브제주바다 현주영 대표가 해양 환경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먼저, 현 대표가 제주 바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 대한 소개가 이뤄졌다. 지난 2014년 현 대표는 인도네시아 발리 앞 바다에서 서핑을 타는 중에 자신 주위를 둘러싼 쓰레기 더미를 느꼈다고 한다. 불쾌한 기분으로 남았던 현 대표의 발리에서의 기억은 제주에서도 이어졌다. 현 대표는 “제주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제주 바다에 있는 쓰레기만 보이기 시작했다”며 “바다 쓰레기에 관심이 생기니까 어딜 가도 쓰레기만 보였다”고 말했다. 이후 현 대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텀블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 2017년 인도네시아 발리의 두 자매가 발리 주지사를 설득해 대형 마트에서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한 일화를 듣게 된다. 현 대표는 “대단하고 환경에 대해 잘 아는 사람만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며 “두 자매 일화를 듣고 나도 친구들과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이브제주바다를 만들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어 제주 해양 환경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제주 바다는 계절마다 해류 방향이 달라진다. 따라서 왼쪽으로 흐를 때도 있고 오른쪽으로 흐를 때도 있다. 현 대표는 “왼쪽으로 흐르게 되면 제주 북쪽 바닷가에 쓰레기가 엄청나게 몰린다”며 “매번 여러 단체와 함께 1톤씩 치운다”고 강조했다. 현 대표는 제주 바닷가에 몰리는 쓰레기는 주로 어업 폐기물이라고 설명했다. 어업 폐기물 중에서도 밧줄이 주를 차지한다. 바닷가에 묻혀 있는 밧줄은 물과 모래가 묻혀 있어 매우 무거워 여러 명이 들어서 치우거나 중장비가 와야 치운다고 한다. 밧줄 쓰레기는 바다를 떠다니며 ‘고스트 네트(Ghost Net)’가 돼 해양 동물을 죽게 만든다. 고스트 네트는 해양 동물을 옭아매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밧줄 다음으로 △플라스틱 부표 △염산 통 △스티로폼 부표 등이 제주 바닷가에 몰려온다. 염산 통과 스티로폼 부표는 김 양식장 등지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 대표는 “스티로폼 부표는 바위에 계속 부딪히면서 알갱이가 부서지기 시작한다”며 “스티로폼 알갱이가 바다에 뒤덮여 뜰채로 다 걷어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어업 폐기물 외에도 생활 쓰레기도 제주 바닷가를 더럽히는 데 동조하고 있다. 생활 쓰레기는 주로 담배꽁초가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페트병 △비닐 △플라스틱 쓰레기 등이 많이 발견되기도 한다. 생활 쓰레기는 이미 해양 생태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9년 제주 중문 앞 바닷가에서 죽은 거북이를 조사해 보니 거북이 배 속에서 많은 쓰레기가 발견된 사례가 있다.
 

제주 교육 기행 참가자들이 제주 김녕 해수욕장에서 ‘비치 클린’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 교육 기행 참가자들이 제주 김녕 해수욕장에서 ‘비치 클린’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교육이 끝난 후 바닷가 정화 활동인 ‘비치 클린’이 진행됐다. 제주 북쪽 바닷가인 월정 해수욕장과 김녕 해수욕장에서 이뤄졌다. 본 기자는 이 중 김녕 해수욕장 비치 클린에 참여했다. 앞서 교육에서 들었던 대로 이날 바닷가 곳곳에서 어업 폐기물과 생활 쓰레기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 빈 병과 밧줄이 있었고, 모래사장에 파묻힌 포대 자루도 있었다. 플라스틱 컵은 물론이고, 스티로폼 조각도 발견했다. 제주 교육 기행 참가자들이 바닷가 이곳저곳에서 쓰레기를 줍다 보니 한 움큼 이상의 쓰레기가 나왔다. 이날 김녕 해수욕장 비치 클린에 참여한 김남윤(벤처중소‧23) 씨는 "본인이 배출한 쓰레기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얼핏 모르고 지나치면 제주 바다가 아름답게 반겨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이면에 환경오염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셋째 날, 제주 4·3: 평화공원과 세화·선흘·월평 

  제주에서 역사를 찾다
  오늘날 제주에 평범하게 보이는 한 그주의 나무조차 제주 4‧3과 관련된 사연이 있을 정도로 제주 4‧3의 피해는 광범위했고 무자비했다. 제주 4‧3이 75주년을 맞은 지금, 제주의 아름다움 한편에 상처로 남은 역사를 찾아봤다.

  제주 4·3 살펴보기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제주 4‧3 평화기념관이 있어 제주 4‧3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이날 신은정 해설사와 함께 제주 4‧3에 대한 역사를 살펴봤다. 먼저 전시실에 들어가면 동굴의 모습을 재현한 입구를 만난다. 신 해설사는 “제주에는 용암 동굴이 많은데 제주 4‧3 당시 제주 사람들의 피난처였다”며 “동굴에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어두웠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동굴을 지나면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있다. 이 백비는 제주 4‧3의 바른 이름을 기다리고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신 해설사는 제주 4‧3이 일어난 배경에 관해 설명했다. 제주 4‧3이 일어나기에 앞서 지난 1947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절 발포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3‧1절 발포 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미군정에 의한 탄압이 이어져 제주 4‧3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3‧1절 발포 사건은 당시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이 끝난 뒤 진행된 가두시위에서 촉발됐다. 가두시위가 끝날 때쯤 기마 경관이 탄 말에 한 아이가 치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기마 경관이 무시하자 주변인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이에 기마경찰은 경찰서로 급히 피신했고, 경찰서에서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끝까지 정당방위라고 주장해 거센 항의가 따랐다.

  이러한 미군정과 경찰의 태도로 인해 지난 1947년 3월 10일 제주에서 각종 관공서와 기업들이 파업하는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이후 미군정은 파업 주동자를 검거하기 위한 명령을 내려 파업 주동자 검거에 나서기 시작했다. 서북청년단도 이때 제주로 들어와 제주도민들을 폭행하고 수탈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당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은 가장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경찰의 고문이나 서북청년단의 폭행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지난 1948년 2월 유엔에서 남한 단독 선거를 진행하기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결국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지난 1948년 4월 3일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것과 남한 단독 선거 반대라는 두 가지의 명분으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제주 4‧3의 시작이다.

  지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1월 군경에 의해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다. 초토화 작전은 해안 마을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해안가로 내려오게 하고 이후에도 중산간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는 무장대의 주요 근거지인 한라산으로부터 떼어 놓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중산간 마을에 사람이 계속 있었다. 신 해설사는 “소식을 믿지 못한 마을도 있었고, 중산간 마을에서 주로 키우던 가축을 데리고 내려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중산간 마을에 해당하는 마을에 사람이 있으면 총살당하거나 집이 불타버렸다”고 말했다.

  나무에서 제주 4·3을 찾다
  제주 4‧3 평화공원에 이어서 나무에서 제주 4‧3을 알아가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야기로 만나는 제주의 나무’를 쓴 이성권 작가가 나무에 담긴 제주 4‧3의 역사를 들려줬다. 제주 세화리에는 두 그루의 우람한 팽나무가 있다. 평범해 보이는 나무지만, 이 나무를 배경으로 제주 4‧3의 한 역사가 담긴 사연이 있다. 과거 해당 팽나무는 세화리의 마을회관 역할을 한 곳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정보를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이 작가는 “지금도 그렇지만 제주에서는 작은아버지나 이모를 삼촌이라고 한다”며 “옆집에 있는 사람도 자신보다 열 살 많으면 삼촌이라 부를 정도로 마을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주 4‧3을 거치면서 삼촌 거리며 부르던 마을 사람들은 이 팽나무에서 서로 앙금이 남게 됐다고 한다. 이 팽나무에서 마을 사람들끼리 각종 밀고자를 가려냈기 때문이다.
 

제주 세화리에 위치한 한 팽나무다.
제주 세화리에 위치한 한 팽나무다.

  세화리는 무장대에 의한 많은 희생이 발생한 마을이기도 하다. 당시 세화리는 오늘날 파출소인 경찰지서가 있던 곳이다. 이렇다 보니 제주 4‧3 당시 무장대의 목표물이 됐다. 본래 세화리는 무장대에 우호적인 마을이었지만, 점차 토벌대에 의해 무장대가 계속 진압당하자 마을 주민을 향한 무장대의 태도가 많이 변했다고 한다. 이 작가는 “무장대가 이 마을에 와서 팽나무로 사람들을 다 나오라고 하면서 집마다 불을 질렀다”며 “대부분 토벌대에 의해 희생당한 곳이 많은데 세화리 만큼은 무장대에 희생당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세화리 다음으로 선흘리로 이동했다. 선흘리에는 지난 1949년 4월에 완성된 낙선동 4‧3성이 있다. 낙선동 4‧3성은 주민들과 무장대 간 연계를 차단하고 정부가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 및 통제하기 위해 조성한 전략촌이다. 마을 사람들은 낙선동 4‧3성에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지어 집단 거주했다. 선흘리도 초토화 작전에 의해 피해 본 마을 중 하나로 정부 지시에 의해 강제로 성을 지어 살아야 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 이런 낙선동 4‧3성 입구에는 팽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팽나무에도 제주 4‧3과 관련된 사연이 있다. 이 작가는 “토벌대에 합류한 민보단이 무장대를 토벌하러 다니다가 선흘리로 내려와 심은 나무”라고 설명했다.

  선흘리에 이어 마지막으로 간 곳은 월평동이다. 월평동은 한적하고 고요한 동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월평동도 불과 75년 전 제주 4‧3 당시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던 마을이다. 월평동 복지회관에서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불칸낭’ 나무가 있다.  

  동백나무인 불칸낭 나무는 초토화 작전으로 집이 탔을 때 같이 불에 탔다. 그러나 불칸낭 나무가 다시 잎을 틔워 아직까지도 살아 있어 제주 4‧3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날 월평동 복지회관에서 본 기자를 비롯해 제주 교육 기행 참가자들은 불칸낭 나무의 주인이자 제주 4‧3 생존자인 한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 뵐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제주 4‧3에 대해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다 못 해준다”며 한 맺힌 듯 말했다. 오늘날 제주의 한적하고 고요한 동네조차 제주 4‧3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제주 4‧3 관련한 설명을 들은 이서희 씨(경영‧22)는 "아직 제주 4‧3을 칭하는 바른 이름이 없어 '제주 4‧3 사건'으로 불리고 있는데, 아픔을 함께 기억할 수 있는 바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넷째 날, 제주 4·3: 너븐숭이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 위령비에 묵념하고 있다.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 위령비에 묵념하고 있다.

  너븐숭이 4·3기념관
  ‘너븐숭이’는 넓은 돌밭이라는 의미로 북촌리 마을 사람들이 밭에 일하러 가거나 바다에 물질하러 갈 때 도시락을 먹거나 쉬는 장소였다고 한다. 너븐숭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휴식 장소였지만, 제주 4‧3으로 인해 지난 1949년 1월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북촌리 학살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됐다. 북촌리 학살 사건은 제주 4‧3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본 사건이다. 

신 해설사가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애기무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 해설사가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애기무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무장대에 공격받은 토벌대에 의해 마을 주민 3백 명이 한순간에 희생됐다. 당시 북촌 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너븐숭이 등지에서 학살이 이어졌다. 너븐숭이에는 20여 개의 ‘애기무덤’이 있다. 당시 학살에서 희생당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를 임시로 매장한 것으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중 8개 이상의 애기무덤이 학살에서 희생당한 어린아이가 안치된 무덤이다. 애기무덤 위에는 인형과 간식이 올려져 있다. 이는 하늘나라에서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갖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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