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여년 간 민간인의 신분으로 독도를 지켜냈던 의용수비대. 그 분들 중 생존자 정원도 씨를 만나 당시의 생생한 얘기와 그의 근황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우리 정부는 곤경에 처했고, 그 당시 국토의 최동단에 위치한 독도에까지 행정권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 어민들의 위령비를 뽑아내고 일본 영토표시 팻말을 세워놓았고 , 일본 해상보안청은 수시로 대한민국 어민들을 방해해 독도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없게 했다. 이 와중에 6.25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상이용사회 회원이 주축이 돼 창설된 것이 ‘독도의용수비대’다.


대부분 48년도 군에 입대해 부상을 입고 돌아온 11명의 청년들이 의기투합한 것이 독도의용수비대의 시작이었다. 52년까지 준비와 계획을 짜느라 시간을 보냈고 어느덧 뜻을 함께 하는 의용대원은 33명으로 불어났다. 의용수비대는 보통 10명 내외를 한 팀으로 구성해 한 달에 한 번씩 교대로 독도를 지켰다. 여자대원들도 있었는데 주로 간장과 김치같은 음식들을 보급하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독도를 지키겠단 신념하나로 뭉치긴 했지만 민간인의 신분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맨몸으로만 있을 수 없는 마당에 무기를 구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기는 의용대 홍순철 대장이 구해오곤 했는데 어떻게 구해온건진 같은 대원들에게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일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대포가 필요했지만 도무지 구할 길이 없어, 한번은 나무와 갖가지 쇠붙이들로 위장대포를 설치한 적도 있었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수 차례 일본인과의 총격적에도 겁나거나 두려웠던 적은 없었단다. 전쟁을 치르고 온 터라 군기하나는 최고였다고. 53년 4월 즈음 독도해상을 침범한 일본해상시추선을 쫓다가, 배가 바다 위에서 72시간동안 조난당했던 기억이 그에겐 가장 아찔했던 순간으로 남아있다.


현재 의용수비대원들 중 생존자는 10명이고 3명은 몸이 안좋아 투병중이다. 다들 팔십의 나이가 훌쩍 넘어 특별한 일 없이 휴식을 취하며 1년에 한 두 번씩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고 한다. 모임 때 주로 하는 이야기는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과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이다. 2005년에 지원법이 통과돼 생존자와 미망인 유족들에게 지원이 될 줄 알았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일본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울릉군수에게 할 말이 많다. 계속 가만히 있다가 2~3년 전부터 허겁지겁 난리치는 정부의 태도가 영 마음에 안들고 못미더워서다. 또한 울릉군수는 독도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울릉도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이용해 관광수입을 벌어들이는데만 혈안이 돼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고.


그 어떤 사적인 욕심이나 영리적 대가없이 독도를 사랑하는 의용수비대에겐 진정성이 부족한 모습이 영 마땅치 않아 보이는 걸테다. 얼마전 국회에서 민간외교단체로 불리는 ‘반크’의 그나마 있는 예산마저 삭감했다는 기사가 떠오른다. 독도가 마냥 관광지화 돼버릴까 걱정하는 그네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비록 몸은 독도를 떠나 있지만 마음만은 수비대 시절 그대로, 언제나 독도와 함께임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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