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인 맷 타이비는 언론이 ‘편향’을 시장 전략으로 채택했다고 분석한다. 매체에 충성하는 구독자를 유치하는 것만이 모든 언론 매체의 목적이 되었다. 형성된 팬덤은 혐오 여론과 가짜뉴스로 상정한 외부의 적을 통해 결속을 강화한다. 이 편향 전략 뒤에는 저널리즘에 대한 대중들의 까마득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저널 신(scene)에서 소멸해가는 대중을 뒤로 한 채, 언론이 순수 언어극으로 변모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페터 한트케가 희곡 『관객모독』을 통해 선보인 언어극은 우리에게 익숙한 연극인 서사극을 부정한다. 허구적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서사극을 넘어서려는 도전이었다. 무대에 등장한 배우 네 명은 우리가 일상에서 수없이 사용한 언어를 매개로 관객에게 말을 걸기만 한다. 그들은 오로지 ‘언어의 흐름’만으로 무대를 구성한다. 이 언어극은 일상에서 수없이 표현해왔던 언어를 기존과는 다르게 사용하여 새로운 눈으로 세상 보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그가 제시한 언어극의 원칙이다. “연극이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하지 않고, 오직 현실에서 쓰이는 단어와 문장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한트케는 관객들을 무대 위 토론장에 초대해 반응을 얻는데, 그는 관객들로부터 얻은 생생한 응답을 언어극에 포함한다. 지문에 존재하지 않는 이 언어 반응은 작품을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 따위 대사가 배우들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이런 자기 최면적 대사는 언어극이 가진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그가 말하길, ‘연극은 모두가 말하기 위한 언어극이다.'

  언론은 모두가 말하기 위한 광장이다. 사적 공간에 침투한 작은 파멸의 균열을 다듬어진 언어로 표출하는 광장, 그것이 바로 언론이 아닌가. 공정을 정조준한 독자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 무구한 정의에 대한 갈급한 갈증을 느끼는 것. 그리고 불필요한 권력과 자본 신화에 거리낌 없이 도전하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언론은 정의실조에 걸려 허덕이는 모든 이들을 위한 희대의 문제작들을 배출하도록 기대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꽤 많은 언론사들은 판매 상품의 질 하락 문제로 인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언론이 시장 자본에 편승한 지는 오래되었다. 언론사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 사고 팔리는 일은 근래 촉발된 이슈가 아닌 것이다. 최근 1년간만 해도 여러 언론사의 주인 자리에는 여러 이름들이 오르내렸다. 언론 기업의 지배구조가 바뀔수록 저널리즘의 방향성은 갈피를 잃어만 간다. 지금껏 언론사의 사시(社是)가 불편부당(不偏不黨)인 줄로만 알았던 대중들의 실망감과 함께 언론 산업은 점차 사양 산업으로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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