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박물관 소장 유물 가운데 도서ㆍ잡지ㆍ신문ㆍ문서류 등과 같은 서지 유물은 약 7,000점이다. 조선 시대에 간행된 것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출판된 것까지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간직한 유물들이다. 그 오랜 시간이 무색하게도, 종이 위에 쓰인 활자들은 바래지도 않고 지금도 여전히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최초로 저술된 한글 연구서 『운해훈민정음』(1750), 조선 지식인들의 사상적 충돌과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서적 『천주실의』(1603), 한국 개신교의 자발적 신앙 수용을 보여 주는 최초의 한글 성경 『누가복음』(1882), 경성지방법원 일본인 검사 야마자와가 증거품으로 압수했던 한 장의 『3.1독립선언서』(1919)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숭실 역시 자신의 역사를 종이에 남겼다. 그중 『숭대시보』는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 운동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한국 최초의 대학 신문이자 『동아일보』ㆍ『조선일보』의 창간일보다 앞선 언론지이다. 엄혹한 시대 속에서도 『숭대시보』는 대학 내 논쟁점뿐 아니라 시사성이 짙은 사회적 문제까지 다루었고, 발행한 신문은 전국 각지의 학교로 배포하였다.

  1938년 일본 제국주의의 신사참배 강요 에 숭실이 자진 폐교로 저항하면서, 『숭대시보』의 역사 또한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재건 이후 서울 숭실이 가장 서둘렀던 작업 중 하나가 『숭대시보』를 속간하는 일이었다. 1956년 10월 10일, 속간호에서 당시 재단이 사장 배민수는 「창안(創案) 연구에 힘쓰라」 라는 제목으로 『숭대시보』가 ‘숭실의 동력 이자 한국민족이 요구하는 사명을 다하는 언론지’가 되길 당부하였다. 문교부장관 최규남, 민의원 부의장 황성수, 전 서울시장 최 태선 등도 『숭대시보』의 속간을 축하하며, ‘죽음에서 부활한’ 『숭대시보』가 ‘학도들의 등불’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렇게 속간된 『숭대시보』는 ‘정론직필’ 의 대학 언론지로서 학내 이슈뿐 아니라 시대의 과제를 기록해 왔다. 민주화 운동이 거셌던 1980년대는 ‘남산에서 주시한 서울 소재 대학 중 요주의 학보사’였다고 한다. 지금도 박물관에서는 학교사를 편찬할 때 『숭대시보』를 한데 모은 축쇄판을 펼쳐든다. 깨알 같은 활자로 가득한 종이 신문을 넘기다 보면 인터넷 기사 검색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학교사의 맥락과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고, 그 시대와 사회상까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숭대시보』는 100년 전 기록이 박제된 유물이 아니다. 『숭대시보』가 가진 기록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며 살아 있다.

  그리고 이 역사성은 미래에도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종이는, 아니 종이 위에 쓰인 기록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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