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부문 당선작
진실에로 향하는 두 개의 교차수(交叉樹)
- 기형도의 시 「폭풍의 언덕」을 두고 -
최선재(국어국문·22)
여기 해묵은 질문 하나. “문학은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담아내는가?” 하지만 그전에 물어야 할 것 하나. “작가의 의도는 과연 온전한가?” 이 질문은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잘 구비해놓았는가 아닌가를 말할 수도, 작가의 원래 의도가 창작 도중에 변하였는가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묻고자 하는 것은, 그 의도라는 것을 작가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 인간의 마음은 다른 인간이 들여다볼 수 없다. 마음이란 말과 행동을 포함한 삶 전반의 산물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결국 한 인간의 마음은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를 갖는다. 인간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인간의 마음을 구체화하는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온전히 주어지지 않았고, 이는 단순히 학문의 발전으로 성취될 영역이 아니다. 사랑, 자유, 고독 등의 추상적 개념을 이야기하는 인간은 그 자체부터가 추상적 존재다. 인간은 그 자체로 미지, 손으로 잡으려 해도 끝끝내 놓치고 마는 물질적 환영. 자기 자신에게조차 미지의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최종적 진실은 때로 존재의 절망이 된다.
그렇기에 문학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 감정과 의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체화할 수 없다. 아예 모르는 것과 조금이나마 아는 것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인 미지는 영원히 풀리지 않으며 미지 그 자체야말로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인간을 탐구한다”라는 성취 불가능한 과업에 계속해서 도전한다. 설령 불가능할지라도, 그 불가능한 도전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계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구체화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구체화하는 것, 추상적 담론을 입에 문 인간이 존재의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지향이자 궁극이고 또한 인간의 지향이자 궁극이다.
그러한 점에서 시는,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모든 장르 중에서 가장 인간 내면에 관심하는 장르다. 시인은 혼돈이 부유하는 자신의 내면을 콱 붙잡으려 한다. 자신이 무엇을 감각하는지, 또한 거기에 어떻게 감응하는지를 시의 언어로 최대한 온전하게 말하려 한다. 인간의 감각, 생각, 기억 등은 분명 실재하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 대상이다. 인간 스스로가 내면의 구체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끝내 실감할 수 없는 미지로 남기 때문이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그 미지를 구체화하겠다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본질을 뛰어넘겠다는 불가능한 과업에 매달리는 자다. 그래서 시의 언어는 구체적이다. 하지만 그 속에 밀도 높은 관념, 즉 추상성을 담아낸 구체적 언어다.
구체성은 자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 추상성은 자각과 경험으로 얻을 수 없지만 인간 스스로의 개념화로 발굴해낸 영역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구체성과 추상성을 모두 지니고 있으므로, 시의 언어로 인간을 탐구한다면 그 언어는 분명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이다. 도저히 맞닿을 수 없을 듯한 두 개념이 맞물릴 때, 비로소 우리는 도달하지 못할 인간 내면의 진실에로 향할 수 있게 된다.
기형도의 시 「폭풍의 언덕」은 시가 지닌 구체성과 추상성의 혼합적 양상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암울한 세계에서 도리어 그 세계와 맞부딪히는 화자의 모습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비장과 처절을 온몸으로 내뿜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 그 자신을 낳은 세계에 대해 화자는 구체적인 묘사로 자신의 깨우침을 전개해나가지만, 그 대상들은 결코 감각과 실재를 보증할 수 없는 거대한 추상이다. 화자의 깨우침은 마냥 깨우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세, 순순히 감각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화자의 태도에서 우린 인간의 ‘무력無力한 저력底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구체성과 추상성은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그 둘이 하나로 얽혀 인간의 진실을 향해 쇄도한다.
「폭풍의 언덕」은 집을 나간 화자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두고 “아버지는 간유리 같은 밤을 지났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존재가 불투명해졌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화자 자신이 느끼는 불투명한 전망 혹은 그 자신의 불투명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화자 자신이야말로 “간유리 같은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뒤이어 언덕에 몰아치는 폭풍. “몇백 개 칼자국을” 긋는 “미친 바람”으로 묘사되는 폭풍은 공포를 자아낸다. 바람이 미쳤다는 것은 그만큼 거세고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면서도, 도무지 그 심중을 파악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광기는 보통의 논리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 화자의 가족은 그런 “미친 바람”의 칼부림에,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난도질당한다. “간유리”와 “폭풍”은 화자의 가족이 겪는 영문 모를 두려움,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뜻한다. 자신들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라는 물음은 이러한 미지에 대한 의문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의문, 혹은 신세 한탄이 아니다. 화자의 물음은 바람의 근원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화자가 폭풍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또한 폭풍이 남기는 “몇백 개 칼자국”에 고통스러워 문지방에 걸터앉아 있으면서도, “지붕”을 뜯어갈 듯한 광포한 바람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고 있다. 그리고 “빨랫줄”에 걸려있던 “아버지의 러닝셔츠”가 힘없이 날아가는 모습을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고 있다. “구깃구깃”과 “두 눈 부릅뜨고”라는 표현을 통해 화자는 그 비장한 심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폭풍의 근원을 반드시 알아내겠다는 다짐이 화자의 행동과 목소리에 서려있다.
폭풍이 어디에서 불어오는가에 대한 물음, 그와 동시에 화자는 왜 자신이 “왼손잡이”인가 하는 물음을 갖는다. 이 둘은 모두 존재의 근원에 관한 물음이다. 전자가 폭풍이라면 후자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 폭풍은 아버지가 사라진 뒤 언덕에 나타났다. “왼손잡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문학적 장치임을 감안한다면 화자 자신의 혈연적 근원인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대상에 관한 물음이 함께 언급되고, 아버지의 부재와 폭풍의 등장 시점이 겹치는 것을 볼 때, 폭풍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일정 부분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광포한 폭풍은 이상하게도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한다. “아버지의 러닝셔츠”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골동품”은 연륜에서 비롯된 지혜와 강인함의 상징이 아닌 그저 낡고 쓸모없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폭풍은 “조용히” 낡은 골동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화자의 물음에 있어 어머니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해답이 되지 못함을 볼 때 “골동품”은 이 집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투영되어있는 물건이자, 아버지야말로 폭풍을 내뿜고 다시 거두어들이는 근원임을 암시하고 있다.
폭풍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면, 그 강대하고 광적인 힘의 주인인 아버지는 화자에게 있어 위압적인 힘을 떨치는 존재라고 예상된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화자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은 “골동품”과 “러닝셔츠”다. 폭풍을 일으킨 아버지는 도리어 그 폭풍이 오기도 전에 사라졌고,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상징하는 “러닝셔츠”마저 “흙투성이가” 된 채 사라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폭풍은 여전히 남아 화자의 가족을 고통 속에 잡아두고 있다. 때문에 화자에게 아버지란 결코 동경의 대상, 살가운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폭풍을 남기고 간 것에 대해 원망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그러면서도 본인이 그 폭풍에 휩쓸려갔다는 점에서 혼란스러운 서글픔을 일으키는 존재다.
화자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왜 “왼손잡이”인지를 묻고, 어머니는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라는 대답을 들려준다. 화자는 실처럼 얇은 핏줄 한 가닥에 불과하다. 애정 속에서 낳고 품은 것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듯이 끊어낸 허물과 같은 존재다. 화자는 자신의 근원에 대해 알고자 하는 갈망을 품었지만, 그 대답은 이토록 초라한 것이다. 왼손잡이가 갖는 사회적 차별과 핍박을 생각한다면 화자의 삶이 순탄치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신의 혈연적 근원인 아버지를 향한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아버지는 증오와 적대의 대상,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근원이다. 부정하고 싶은 근원은 곧 극복의 대상이 되며, 화자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아득히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극복의 난관이, 스스로가 불러온 폭풍에 되려 휩쓸려갔다. 이로 인해 화자의 분노 서린 열망은 허무하게 가라앉는다. 여기서, 왜 화자가 폭풍의 근원을 알고자 하는지가 비롯된다. 자기 존재의 난관이었어야 할 아버지를 파멸에 이르게 한 폭풍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전히 언덕 위에서 미친 칼자국을 남기는 저 폭풍은, 진정 어디에서 시작되었단 말인가.
“암흑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집”을 두고 화자는 밖으로 나온다. 그 자신의 “불끈거리는 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언덕을 오르는 것이다. 밤이 되어도 언덕에는 미친 듯이 비와 바람이 퍼붓고 있다. “헝겊 같은 배”를 움켜잡은 화자 앞으로 “광포한 바람”이 “수천 장 손수건을 찢어 날리”고 있다. 화자 역시 바람에 찢겨나갈 만큼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미친 바람”에게서 물러서지 않는다. “풀더미에 칼집 속에 하체를 담그고” 폭풍의 칼부림을 각오한 화자는 자기 존재에 대한 기나긴 고뇌, 그 답답한 미지를 결판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화자는 문득 “성냥개비 같은” 자신의 “오른팔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무서운 섬광”을 발견한다. 전자는 가늘고 연약하지만 불을 피워내는 힘을 품었고, 후자는 그 끝에서 타오를 번개를 말한다. 화자는 이를 무섭다고 말한다. 오른팔에서 마주한 이 힘은 폭풍과 맞닿아있는 것, 즉 자기 아버지의 그것과 같은 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불러온 폭풍 속에서 화자는 자신 또한 폭풍을 불러올 수 있음을 목격했다. 지금은 “헝겊 같은 배”를 가진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이지만 언젠가는 손끝에서 번개와 폭풍을 일으킬, 어쩌면 아버지에 뒤이어 자신이 만들어낸 폭풍에 자멸할지 모르는 운명을 지닌 것이다. 그 순간, 화자는 마침내 폭풍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를 알 것 같다고 말한다. 끝내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혈연적 근원을, 그 근원으로부터 비롯된 자기 삶의 고통과 시련을, 그로 인해 비극적 결말을 거듭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자기 존재의 진실, 태생에서 비롯되는 운명에 대한 깨우침은 결코 축복의 길이 아니다. 미지의 두려움이 벗겨지고서도 앞으로의 삶은 여전히 미지로 남아있기에, 그리고 아버지의 자멸을 반복할지 모를 음울한 운명을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풍은 화자와 화자의 아버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화자는 폭풍을 “언덕 가득 이 수천 장 손수건을 찢어 날리는 광포한 바람”이라고 말한다. 언덕은 수많은 손수건들의 무덤이자 그 난도질의 참혹한 현장이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을 “헝겊 같은 배”라고 표현한다.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이라는 표현에 비출 때 “헝겊 같은 배”는 화자 자신의 허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허기는 가난에서 오는 굶주림보단, 그보다 더 큰 존재론적 고민과 그 해답에 대한 갈망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화자가 “불끈거리는 예감” 때문에 폭풍의 언덕을 올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언덕은 화자의 개인적 공간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기 존재에 대해 고뇌하는 인간들이 도달해야 할 고지高地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폭풍은 언덕에 올라선 인간들에게 더 큰 고통과 시련을 주면서, 때로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키기도 하지만. 화자와 같이 끝내 버텨낸 자들에게 강력한 계시를 선사하는 존재다.
앞서 화자는 어머니로부터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라는 말을 듣는다. 이는 화자의 비극적 태생과 운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운명이란 그저 우연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정맥”을 끊어낸 아버지는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왼손잡이”라는 태생적 기질도 아버지를 근원으로 두고 있으나, 결코 아버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가 아니다. 화자가 폭풍과 자신에 대해 물음을 가졌던 것은 분명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적개심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풍이 도리어 아버지를 사라지게 만들었음을, 자신의 운명을 작정하고 만들어냈다고 봤던 것이 실은 우연한 사건에 불과했음을 화자는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아버지를 향해 원망과 적개심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화자가 자신의 집을 나온 것은 아버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였다. 이 시는 한 인간이 생애의 고통과 비극을 오롯이 자신의 운명으로 포용하는 극적인 순간을 다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풍은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화자의 것이 된다. 동시에 모든 인간이 저마다 품고 있는 것으로 확장된다. 폭풍은 “미친 바람”이다. 너무나도 강대하여 그 자신마저 휩쓸어버릴 수 있는 힘, 그 정체조차 알 수 없는 공포스러운 힘이다. 화자는 팔 끝의 번개를 발견하고는 폭풍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를 이제야 알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앎’은 복잡한 의미를 품고 있다. 정말 화자는 폭풍이 무엇인지를,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았을까? 아버지의 폭풍과 자신의 폭풍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안다면, 곧 모든 인간에게도 각자의 폭풍이 있음을 화자는 직감했을 것이다. 폭풍의 위험한 힘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멸의 가능성도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직감의 영역의 끝이다. 겨우 번개의 단초만을 목격한 화자는 폭풍을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여기서의 ‘앎’은 직감을 넘어선 영역까지 포괄한다. 당장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앞으로의 운명을 향한 ‘예감’까지를 말이다.
일찍이 아버지는 폭풍을 다스리지 못해 자멸했고, 언덕에는 폭풍을 버티지 못해 쓰러져간 자들이 서슬의 “칼집”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렇지만 이들 존재는 비단 슬픔과 공포만이 아닌, 그럼에도 이 운명을 품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운명적 예감을 보여주고 있다. 화자가 경험한 자기 내면의 성찰, 존재론적 고뇌는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평생에 걸쳐서도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은 끝까지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자신의 행동과 위치를 되새기며 정신을 일깨우고자 사투한다. 그렇게 인간은 도달하지 못할 진실의 영역에 계속해서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폭력적이다. 한 존재의 안주安住와 기반을 모조리 파괴하고 폐허에서 다시 일어날 것을 강요한다. 폭풍은 진실의 위압적 면모에 대한 상징이다. 그 위압을 버티다 못해 수많은 이들이 얇은 “손수건”처럼 찢겨나갔고 화자의 아버지도 같은 몰락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인간이 지향이자 궁극이라면, 파멸적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 사는 길, 폭풍의 언덕을 자신의 터전으로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어디서 폭풍이 불어오는지를 알겠다고 말한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폭풍에 깃든 인간 존재의 진실을 감각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폭풍을 품고, 저마다의 언덕을 끝없이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폭풍과 언덕에는 그러한 역사가 스며있다.
오랜 고뇌를 청산한 화자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언덕을 내려온다. 여전히 밤이지만, 이제 화자는 “밤유리 같은” 불투명한 시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버지의 “수염투성이” 바람이 화자를 마구 긁은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화자는 아버지가 끊어낸 “한 가닥 실정맥”에 불과하지만, 피투성이가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이 많은 피를 품고 있음을, 이제는 나약하고 괴로운 과거에서 벗어났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와 같은 어머니를 보며, 더 이상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수 없음을 느낀다. 핏기 없는 “유리막대”에 불과한 어머니와 그 집은 이제 온몸으로 폭풍을 맞고 그 정체를 예감한 화자가 머물 곳이 아니다. 더 이상은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할 이유도, 어머니의 누이와 모습을 보며 슬픔에 잠겨있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다음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화자는 “폭풍의 밤”에서의 사투를 마쳤다. 이제 자신이 “떠날 차례”다. 폭풍과, 피와, 번개를 품고 화자는 음울한 운명을 개척하고자 집을 떠난다. 그 길을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들이 마중하고 있다. 수많은 역사와 운명과 그 지독한 모순을 품은 풀잎들은 일찍이 언덕에서 쓰러진 자들의 잔재. 화자는 그들의 무서운 “비명”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칼집”으로 전락한 자들에 맞서 자신은 “칼자국”을 내는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선포인 것이다.
화자의 행동이 확신에 차 있다고 말할 순 없다. 화자는 아직 아는 것도, 겪어온 것도 부족한 상태다. 하지만 그가 품은 강렬한 예감이 행로를 이끌고 있을 뿐이다. 예감이 그를 어디로 이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애초부터 미지이고 각자의 진실 또한 도달 못할 미지이기 때문에, 용기를 품고 그 미지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때문에 음울한 운명으로 나아가는 화자의 모습은 결코 음울하지 않다. ‘무력한 저력’을 품은, 처절하나 비장하고 강인한 인간의 모습이다.
기형도의 「폭풍의 언덕」은 구체성의 영역으로 담아낼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추상성을 담아낸다. 그리고 이는 모든 시와 문학, 그리고 예술의 지향이기도 하다. 「폭풍의 언덕」에 나타나는 수많은 비유와 상징은 제법 난삽하게 보이기도 한다. 과도한 수사로 인해 시의 압축미를 구현하지 못한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만큼 인간에 관한 거대한 관념을 다룬 작품도 드물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시의 가장 중요한 상징은 “폭풍”과 “언덕”이다. 그리고 두 상징은 인간 존재의 추상성을 포괄하는,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인 상징이다. 폭풍과 언덕을 통해 자기 존재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자신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런 인간의 내면이야말로 추상적 대상인 것이다. 감각할 수 없는, 실재하는 대상이 없는 추상성을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이유는 인간 자신이 추상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은 분명 존재한다. 적어도 자신의 내면이라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느낄 수 없다. 자신이 무얼 감각하는지, 생각하고 기억에 담아두는지를 인간은 매 순간 알 것 같다가도 놓쳐버리며 자기 존재의 방황을 겪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역시 해묵은 질문이 끝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을 느끼고 구체화할 수 없다는 절망이 오래도록 이 질문을 붙잡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달려왔다.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누구고 이 세계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오래된 열망이며, 그것이 예술을 낳고 문학을 낳고 시를 낳았다. 「폭풍의 언덕」은 이러한 열망을 처절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화자가 말하는 “폭풍”과 “언덕”은 거대한 추상적 관념을 품은 구체적 상징이다. 하지만 그 안의 관념이 솟구치며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내비친다. 동시에 그것은 구체적 언어로서 형상화되었기에 분해되지 않고 단단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구체성과 추상성은 시의 언어를 통해 함께 맞물리며 나아간다. 추상성만 있다면 인간을 감각할 수 없다. 하지만 구체성만 있다면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주제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구체성과 추상성이 교차수交叉樹를 이루어 진실에로 쇄도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온전한 설명, 불가능에 대한 가장 치열한 도전이다. 「폭풍의 언덕」의 목소리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장미를 풍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화자의 자기 존재를 향한 열망이 맹렬히 솟구치기에, 동시에 인간에 대한 강력한 통찰을 외치고 있기에 「폭풍의 언덕」은 빈틈없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름 붙이기다. 그 이름은 고립되지 않고 다른 이름들과 관계를 맺으며 무한한 표상의 상호작용을 이룬다. 무한한 표상은 영원히 정복될 수 없는 무한한 영역에 대한 도전이다. 그 무한한 힘이, 가닿을 수 없는 진실에의 줄기가 되는 것이다.
참고 문헌
엄경희, 『시_대학생들이 던진 33가지 질문에 답하기』, 새움출판사, 2020.
이흥표, 『문장완성검사의 정서적·역동적 해석』, 깊은 우주, 2023.
|평론 부문 심사평
숭실문화상 중 다형문학상 평론부문은 지난 3년간 코로나 영향 때문인지 응모자가 극히 저조하였으나(3년간 단 1명만 응모), 올해는 두 명이 보내왔다. 한 사람은 국어국문학과 2학년 최선재이며, 기형도의 시 <폭풍의 언덕>을, 또 한 사람은 예술창작학부 문예창작전공 3학년 고현지인데, 호프만스탈의 소설 <찬도스 경의 편지>를 각각 분석하였다. 두 사람 모두 다루는 장르와 작품은 달랐지만, 공교롭게도 언어예술로서 문학의 본질적 특성, 그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주목하고 천착한 공통점을 볼 수 있어서 더욱 반갑고 흥미로웠다. 두 평론을 읽어보고 우리 심사위원은 최선재의 평론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조금도 이견이 없었다.
고현지는 작품의 ‘언어’적 측면을 천착하였는데, 경험들의 표현 속에 경험 주체의 발견 불가능으로 인한 언어의 절대성,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정서와 구분되는 ‘정동’의 개념을 구사하였고, 언어의 개념성에 한계를 느낀 작가 호프만 스탈의 태도 등을 주목하였다.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에 공감하고, 주장하는 내용들에 수긍되는 면이 있으나, 왜 그런지에 대한 뒷받침이 다소 허술했고, 성급하게 결론을 짓는 아쉬움을 남겼다. 작품에 의욕적으로 접근하고, 일관되게 추적하는 미덕을 가졌으니 앞으로 더 좋은 평론을 기대한다.
시 작품을 분석한 최선재는 심사위원을 놀라게 했다. 대학 2년생의 수준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감수성과 통찰력,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차분하면서도 예리한, 단단한 시선은 매우 돋보였다. 기형도의 시를 분석하면서 “구체화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구체화하는” 시인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에 대해 골똘하게, 거침없이 개진하여, 읽는 이의 공감과 수긍을 수월하게 이끌어냈다. 〈폭풍의 언덕〉의 화자가 자신의 근원, 가정이 처한 보이지 않는 이면구조, 모든 식구들이 감내해내야 할 ‘폭풍’의 상징 등을 낱낱이 그러나 서로 연결지어 깊은 데로 탐구해 들어가는 과정은 평론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또 하나의 작품을 읽듯, 몰입하게 만든다. 문학을 소화하여 재창조하는 아름다운 힘을 꾸준히 펼쳐나가길 성원한다.
김인섭 교수(문예창작전공)
이경재 교수(국어국문학과)
|소설 당선 수상소감
기형도의 <폭풍의 언덕>을 처음 접한 일, 그 평론을 쓴 일은 모두 우연입니다. 삶은 우연입니다. 그 우연이 여기까지 저를 데려왔습니다. 맥락 없는 순간과 흩어지는 잔향이 제 존재의 전부이지만, 동시에 모든 우연에는 각자의 운명이 스며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운명은 다만 존재의 맥락을 스스로 엮어나가는 자에게 주어지기 마련이고, 하루의 부피만큼 쏟아지는 우연에서 나름의 갈피를 심어놓았을 뿐입니다. <폭풍의 언덕>에서 제 운명의 단상을 우연히 목격한 것은 이러한 노력의 성숙이라고, 유약한 삶은 아니었다는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저의 글에 과분한 평가를 내려주신 김인섭 교수님과 이경재 교수님, 시와 삶의 독법을 가르쳐주신 엄경희 교수님, 그리고 저를 깊은 잠에서 깨게 해주신 이흥표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