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 중의 하나는 돌봄 노동입니다. 돌봄은 재생산 노동으로서,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고 그들의 노동력을 유지하는 활동 전체를 가리키는데요. 여기에는 육아는 물론이고, 요리, 청소, 세탁 같이 매일 하는 일과와 환자, 장애인, 노인을 돌보는 일까지 포함됩니다. 돌봄 노동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이지만, 무상 혹은 저임금으로 저평가되곤 합니다. 돌봄이 젠더적으로 여성의 의무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그 문제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여성에게 다른 사람의 안녕을 책임지게 하고 여성이 재정적, 물질적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러운 공공의 권고처럼 “적정 온도”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 수치들은 일상생활의 기준이 되고, 마치 오래 검증된 과학적 합의처럼 변화하는 절기의 온도 ‘표준’이 된다. 그러나 그 기원을 더듬어 보면, 이 “적정 온도”는 단순한 생리학적 지표가 아니라 근대 과학과 제국주의가 함께 만들어낸 역사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19세기 유럽 제국들은 열대 식민지, 제국의 병영에서 군인인 백인 남성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쾌적성과 체온 변화에 관한 실험을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특정 온도를 ‘표준’이라 규정했다
보다 하얀 가루가 먼저 쌓인다. 바로 제설제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밟고 지나가는 이 가루는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염화칼슘이다. 한편 남해 해안에는 매년 수십만 톤의 굴 껍데기가 쌓인다. 일부는 사료·비료로 재활용되지만 상당량이 여전히 매립·투기되며 골칫거리 폐기물 취급을 받는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풀어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다. 굴 폐각으로 제설제를 만드는 스타트업 ‘쉘피아’의 최수빈 대표다. 2022년 6월 설립된 쉘피아는 “굴 껍데기를 자원으로 바꾸고, 국내에 거의 없던 염화칼슘 생산 기반을 만들겠다”는 다소 무모
사랑이란 보편적인 사건인 동시에 개인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공통된 경험이라는 차원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체험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주란의 「겨울 정원」(『문학동네』, 2025년 봄호)은 청소일을 하는 노년 여성을 통하여, 사랑의 두 가지 얼굴을 차분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기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60살의 여성이 있습니다. 오피스텔에서 청소일을 하는 혜숙은 수십 년을 혼자 살아왔으며, 현재는 소설 쓰는 딸 미래와 함께 지내는데요. 이 작품의 상당 부분은 혜숙의 일상을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하는 “정주(定住, Wohnen)”는 단순히 특정한 장소에 거주하는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는 “정주”를 인간이 이 세계에 의미 있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끌어올린다.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정주”는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한다는 물음의 근원에 놓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주”의 가능성이 집을 짓는 행위—건축(Bauen)—의 바탕이 된다. 하이데거에게 “정주”는 대지와 하늘, 신성한 것과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이 조화롭게 겹치는 상태이다. 이런 요소들이 균형 있게 얽혀 세계에 대
“티켓 한 장이 ‘현장’을 바꿀 수 있을까?” 굿즈 제작자로 공연장을 오래 드나들던 송광용 대표는 같은 푸념을 반복해서 들었다. “입장은 막히고, 위조는 줄지 않고, 정산은 왜 이렇게 늦죠?” 그는 코로나의 공백기에 코드를 붙들었고, 2022년 말 ‘부스터랩(BOOSTER LAB)’을 세웠다. 목표는 단순했다. 티켓 한 장으로 ‘입장–운영–정산–팬 경험’을 한 번에 바꾸는 것. NFC 카드티켓, 운영과 수익을 동시에 바꾸다 부스터랩의 티켓에는 NFC 칩이 들어 있다. 관객은 게이트에서 ‘태깅’ 한 번이면 입장 완료, 백오피스에는 좌
작가 황정은은 사회적 어둠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닌 작가입니다. 특히 사소한 기미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문체는 독자와 평론가의 주목을 받아왔는데요. 출세작인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에서 오래된 전자상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과 소외를 표현하기 위해 형상화한 ‘그림자’는 한국문학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만한 성취입니다. 이번에 이야기해보려는 「문제 없는, 하루」(『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는 ‘악’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며, 더욱 깊은 사유의 세계로 독자를 이끕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자매인 영인과 인범입
푸른 꿈을 안고 마련한 건축 책을 몇 페이지 넘기다 보면 다양한 기둥과 변천을 보여주는 그림들로 가득하다. 도리안, 이오니아, 코린트, 튜스칸처럼 집을 만드는 기둥에 관한 관심은 유럽의 고전 건축을 상상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고정된 출발점이다. 건축물이 중력과 바람 등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들을 이겨내는 데 필수적인 기둥, 그러나 20세기 초 시작된 근대주의 건축에서 기둥은 양식과 장식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한 시스템과 구축의 사고로 진화한다. 이 사고의 정점에 1914년에 등장한 도미노(Dom-ino) 이론이 있다. 최소한의 기둥으로
“시험차에서 버려진 부품, 그게 우리 첫 번째 자원이었다” 현대차 파일럿 차량 생산기술 엔지니어였던 박상균 대표는 시험차에 쓰이고 버려지는 부품 더미를 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자원을 제대로 순환시킬 수 없을까?” 사내 스타트업 제도에서 1년간 사업화 실험을 거친 뒤, 그는 바깥으로 나와 에픽카(eficar)를 세웠다. 첫 외부 투자 약 1억 원으로 시작한 작은 팀은 지금 실시간 차량 수리 데이터를 기반으로 ‘적시에, 적합한’ 대체부품을 제안·공급하는 회사로 자리 잡았다. 관행의 틈을 숫자로 메우다 중고·대체부품 시장은 정보
김혜진의 「빈티지 엽서」(『Axt』, 2024년 11·12월)의 그녀는, 평범함이 유일한 개성일 정도로 평범한 중년 여성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15년째 자전거 대리점을 꾸려가며, 최근에는 중국산 고춧가루를 팔지 말지를 고민합니다. 일하느라 여행은 엄두도 못 내는 그녀가, 당뇨 초기 진단을 받고 헬스장에 다니면서 모든 일은 시작됩니다. 그녀는 헬스장에서 파란 바지의 남자를 만나는데요. 남자로부터 스쾃 자세를 조언받고, 러닝화를 추천받으며 조금씩 친해집니다. 남자는 해외에서 사 온 ‘빈티지 엽서(실제로 사용된 엽서)’를 취미로 수집해왔
유럽과 북미, 일본의 도시와 건축에 관한 서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그 원인을 건축이나 도시 담론 자체에서 발견하기보다 유럽 지성 사유의 변화에서 찾아보는 것이 때론 더 흥미롭다. 문명의 최전선이라 자부했던 유럽과 두 번의 세계대전, 대규모의 살상과 비인간화를 초래한 비극의 원인을 고민하고 치유해야 하는 엄중한 시간을 전후 유럽 사회는 마주해야만 했다. 에릭 프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테어도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과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탈근대론,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라는 정신분석가이자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론이 어찌나 난해한지, 라캉이 죽었을 때 한 신문에는 “자크 라캉을 이해하던 유일한 지구인이 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부고 기사까지 실렸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입니다. 갑자기 자크 라캉이 생각난 이유는 이희주의 「사과와 링고」(『릿터』, 2025년 4·5월)를 읽다가 자크 라캉의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 개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희주의 「사과와 링고」에는 한 살 차이가 나는 사라와 사
건축 스튜디오가 있는 문화관 복도를 걷다가 가끔 “실무적인 건축”이란 말을 어깨너머 들을 때가 있다. 특히, 학벌과 인맥으로 해가 갈수록 견고해진 건축 취업 시장에서 “실무”가 원하는 교육을 스스로 구하려고 하는 욕망의 구조가 학교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과연 무엇이 그렇게 실무적이란 걸까? 건축 업계에서 진행되는 “실무” 방식은 20세기에 수입된, 면적과 프로그램을 합리적으로 담고 도면제작을 당연시하는, 대상화되고 객관화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실무”가 된 지 오래다. 흔히 한국에서 전문가 교육으로 진행되는 건축교육은 주로
외국인 환자–한국 병원 사이엔 세 가지 벽이 있다. 가격의 불투명, 품질 검증의 어려움, 언어 장벽. 김대이 헬스피디아 대표는 이 벽을 AI 에이전트와 가격 협상력으로 허무는 사람이다. “특정 병원에서 환자가 직접 치료받으면 330만 원, 저희를 통해 치료받으면 230만 원입니다” 한 문장이 이 회사의 존재 이유를 압축한다. 출발선: 왜 헬스피디아였나 김 대표의 관심은 원래 ‘비급여 가격 비교’였다. “비급여 플랫폼을 운영하다가 글로벌로 나갈 길을 찾았고, 의료관광이 보였죠. 한국 병원비가 해외보다 반값 이하더라고요” 한 국의 품질
김살로메의 「뜻밖의 카프카」(『뜻밖의 카프카』, 아시아, 2025)는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든 가정주부 로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입니다. 마흔이 코앞인 로사는 이제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 홍삼 엑기스, 위장약 카베진”을 “삼종 세트 치유제”로 삼아 일상의 고단함을 버텨 나가는데요. 촉이 좋은 분들은 벌써 눈치채셨겠지만, 로사는 일상의 소외와 고독에 힘겨워합니다. 그런데 놀라운(어쩌면 당연한) 것은, 그러한 소외와 고독을 낳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로사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첫 번째 존재는 바로 “원칙에 충실
한때 대중 미디어에서 “학교는 감옥이다”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입시 지옥으로 변한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짚음과 동시에 이를 가능케 하는 물리적 실체, 학교 공간 자체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영향인지 이후 지어진 많은 학교 공간은 외견상 최소한 색다르고 흥미로운 공간들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록달록한 실내와 아기자기한 외부로 통하는 공간, 하지만 여전히 수능과 대입을 위한 욕망이 지배하는 학교, 정말 새로워졌을까? 학교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근대화가 수입한 흥미로운 효율이 내재해 있
금융과 예술 사이 ‘자금의 다리’ 첫 투자 알림은 새벽이었다. “전혀 모르는 고객이 100만 원을 투자했습니다.”조영린 에버트레저 대표는 푸시 한 줄을 ‘출발선’으로 기억한다. 추상적 구호보다 투자 버튼이 눌리는 순간을 더 믿는 사람. 목표는 단순했다. 돈은 도는데 파이낸싱은 막힌 예술·콘텐츠 시장에 금융 인프라를 깔아주는 것. 그 배경은 의외로 촘촘하다. 중국계 상업은행에서 자금 운용 딜러로 출발해 미국 금융권 FX를 거쳤고, 로스쿨과 변호사를 지나 P2P 금융(8퍼센트)에서 중저신용자 모델링과 기관 자금 유치를 다뤘다. 집에서는
김경욱의 단편소설 「도련님은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현대문학』, 2025년 1월)는 한 인간의 성숙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자 작가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가소설(Künstlerroman)입니다. 이 작품에서 인간으로 성숙하는 과정과 한 명의 작가로서 탄생하는 과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네 명의 누나들 사이에서 “내동댕이쳤다 움켜쥐고 움켜쥐었다 내동댕이치는 주먹” 속의 “공깃돌”처럼 성장합니다. 그것은 스스로에 의해 “속눈썹 위에 올려진 성냥개비 같은 인생”으로 규정되는데요. “내면까지 누나들의 세계와
매일 아침 동작대교를 건너며 마주하는 한강의 풍경, 아파트 단지 공사장의 타워 크레인은 오늘도 지칠 줄 모른다. 병풍처럼 늘어선 2세대 강변 아파트들을 재생산하는 모습. 더 높아지고 촘촘해진 무채색의 열주, 지난 세대 넓적한 판상 아파트를 대신해 세워지는 더 두텁고 훌쩍 높아진 부의 성벽이다. 재건축되는 한강 변 도시 풍경과 함께 “한강 르네상스”라는 말이 오랜 기간 꾸준히 표어로 등장한다. 요즘 다방면에서 차용되는 “르네상스”는 대체 어떤 욕망이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다시 태어났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주로 긍정
“나만의 캐릭터, 나만의 콘텐츠로 먹고사는 시대.” 이 말은 이제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카카오톡 이모티콘 같은 플랫폼을 통해 수많은 개인이 콘텐츠를 만들고, 팬덤을 형성하며,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 하지만 문제는 명확하다. 창작자들이 콘텐츠는 잘 만들지만, 수익화와 사업화에는 서툴다는 점이다. 이 틈을 기회로 보고 사업을 시작한 스타트업이 있다. 바로 핸드허그(HandHug)다. 2015년 8월 창업한 핸드허그는 크리에이터의 콘텐츠를 제품으로 만들고, 유통망을 제공하며 수익을 극대화하는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