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1일, 2026년도 학생회 정기선거의 개표가 마무리됐다. 당선된 새로운 학생대표자들의 출범까지 한 달을 앞둔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학생대표자란 과연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 최근 불거진 제65대 총학생회 S:SURE의 대응은 이 질문의 무게를 더욱 크게 한다. 0학점 재학 제도 폐지 사안은 학생들의 학업·진로·병역·장학 등 실질적 삶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총학생회는 그 과정에서 학생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일부 학생들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의 책무
작업복은 작업할 때 입는 옷, 즉 일에서 그들을 사고로부터 보호하거나 혹은 더욱 편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한다. 그러나 1부에 나온 이들의 옷은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오물을 가까이하며 일을 하지만 작업복은 땀을 고이게 하고 움직임을 방해한다. 1부의 내용을 읽으며 그들에게 작업에 맞는 옷이 지급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돈 때문이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하수처리 노동자의 안전화도 소각처리 노동자의 장갑도 마찬가지다. 고작 몇만 원을 아끼기 위해 안전을 등한시하는 이들은 정작 책상 위에 앉아 노동자들의 옷을 정하고
‘SKIP’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네 글자입니다. 유튜브를 시청하기 전 나오는 광고 영상은 콘텐츠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어릴 적의 저는 심지어 광고가 일종의 불필요한 과대포장 같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치워버려야 하는 귀찮은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 생각은 고등학교 시절 한 수업을 계기로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그 경험을 공유하며 숨겨진 광고의 매력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 현재 광고 감독으로 계신 공덕수 감독님의 광고 촬영 수업을
‘헤맨 만큼 내 땅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위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신 경험이 있으실까요? 이 표현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고난과 역경은 찾아올 수 있지만, 그렇게 방황해 온 시간조차도 훗날 좋은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청춘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스무 살의 제가 대학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느낀 청춘의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서울과는 정말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의 한 소도시에서 성장해왔습니다. 당시의 주어진
혹시 아날로그만의 특별한 느낌을 경험해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자주 느낍니다. 손으로 만졌을 때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 잉크 냄새 같은 것들은 스마트폰 화면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진짜 만져지는 무언가’가 있잖아요. 특히 저는 생일이나 기념일에 카카오톡으로 보내오는 기프티콘 메시지보다 정성이 담긴 손편지와 예쁘게 포장된 실물 선물을 받았을 때 그 감동이 훨씬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고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버튼 하나로 바로 전송되는 메시지, 몇 초 만에 원하는 정보를 찾아주는 인터넷, 찍는
철들던 시절, 삶이 책이라면 그 삶의 한 페이지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요? 누군가는 그 페이지를 몇 번이고 돌려보고, 좀처럼 손에서 놓지 못해 애써 붙잡고 있겠지요.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를 타듯, 모든 인연에도 때가 있다는 뜻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이별을 포함해 우리가 지나온 여러 시절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 그 주변 환경이라는 조건들이 서로 어우러진 하나의 페이지입니다. 어떤 인연은 아주 깊고 오래 머물다
어릴 적 나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뚜렷한 선택을 하고 감정을 통제하며 책임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존재가 될 줄 알았다.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단단한 채로 앞으로 주저 없이 나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된 지금, 어른이라는 말은 여전히 낯설고 멀다. 어쩌면 나는 무대 위에서 어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일지도 모른다. 주변에서는 늘 “어른답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그 말엔 더 성숙하고 강인하며 모든 걸 감당하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기대를 온전히 충족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괜찮은 척, 무너지
영원토록 이어질 것 같았던 나의 성장기에도 마침내 종지부가 찍혔다. 손목과 발목이 드러나도록 짧아지는 옷소매와 세상을 보는 높이를 그어 만든 나이테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 됐다. 다만 시간만이 내가 잃은 만큼의 성장 가속도를 붙여 달려나가고 있을 뿐이다. 어제와 오늘을 구분할 수 없고, 작년과 올해의 차이를 실감할 수 없다. 내게 한 겹 두 겹 정성스레 입혀주며 오늘과 다른 내일을, 잡히지 않을 것 같던 유년기의 끝을 기대하게 만들던 시간은 이제 서늘한 바람으로 돌아와 한 뼘씩 나를 덜어가게 됐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말을 아시는지요. 시간은 항상 속절없이 흐르기에, 그 속에 담긴 자그마한 인생은 터무니없을 만큼 보잘것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느 신이 시간을 관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자꾸만 야속하게 도망가서 붙잡고 싶은 것들을 놓치게 만들고는 합니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눈물 흘리기’밖에 없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막이 내린 기나긴 연극으로 상상해보면 어떠신지요. 배우가 밟은 무대는 그 열띤 움직임에 긁혀
장마가 온다. 누군가는 미리 접어둔 우산을 다시 꺼내고 누군가는 여름 햇살을 미처 누려보지도 못한 채 빗소리에 하루를 건넌다. 늘 이맘때면 우리는 무언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말고사, 보고 서, 스펙, 자격증. 쏟아지는 빗줄기만큼이나 정해진 마감들이 우리 어깨를 두드린다. 하지만 비는 참 이상한 계절의 감각이다. 걸음을 느리게 만들고 낯선 기억을 데려오고 무심하게 지나치던 골목의 색까지 문득 짙게 느껴지게 한다. 빗물에 번지는 거리의 불빛은 왜 항상 옛날 생각을 데려오는 걸까. 어느 여름날 젖은 운동화를 신은
이 글은 ‘혐오’와 ‘사랑’이라는 인간의 미약한 논리 구조와 형이상학 지식으로는 차마 그 본질을 모두 헤아릴 수 없으며 만사의 근원이 되는 두 본질에 관한 고찰이다. 본론에 앞서 이 글은 혐오와 사랑을 갈라놓으며 사랑이라는 가치만을 추앙하고 혐오라는 가치를 멸시하는 글이 아님을 밝힌다. 혐오에 찌들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소소한 해방감을, 사랑의 실천 방법을 몰라 헤매는 이들에게는 사랑의 실천법을 제시하는 글이다. 이 글은 비문학도, 철학적 글쓰기도 아닌 그저 세상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청년 의 푸념 정도로 하겠다. 혐오의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한마디 앞에서 머뭇거린다. 아마 바쁘게 살아가느라 잊고 있었거나 ‘이 정도는 취미라고 부를 수 없지’라며 자신을 검열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종종 ‘취미’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무게와 기대를 걸고 있는 건 아닐까. 악기를 연주하거나 사진을 찍고, 제빵을 하거나 드로잉을 해야만 취미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취미는 그렇게 거창할 필요가 없다. 눈 오는 날 유튜브에서 ‘눈 내리는 카페 BGM’을 검색해 듣는
어느덧 4월이 오고, 곳곳에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네요. 여러분은 이번 봄을 행복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문득 ‘영원한 행복이 존재할까?’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이 아닐까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제가 영원한 행복을 위해 생각한 작은 방법들을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휴대폰 메모장에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제가 메모장에 적은 것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계단을 걸을
봄은 꽃들의 숨겨진 운명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인다고, 내가 좋아하는 책의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벚꽃이 어떤 환호를 받으며 비처럼 낙하할지, 목련이 어떤 색으로 바뀌어 종내엔 우리 발끝에 채이게 될지. 그러나 꽃들의 유한한 운명과는 무관하다는 듯, 이맘때쯤의 따스한 지구의 공기는 봄 마다 우리가 낙관적 미래를 도모하게끔 한다. 그 꽃들 곁의 사람들이 해마다 반복되는 이 권태로운 봄에도 여전히 ‘새로운 시작’, ‘출발’, ‘도전’, ‘설렘’ 같은 이름을 붙이게끔 한다.지구가 매해 봄마다 따스한 공기를 타고 우릴 따스한 단어 품으로
프랑스 교환학생 생활 중 가장 많이 먹은 프랑스 음식을 꼽자면 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음식은 대체로 짜고 느끼해서 내가 유일하게 많이 먹을 수 있던 음식이 빵이었 다. 프랑스 사람들은 주식이 빵이기 때문에 가성비가 좋다. 처음에는 빵을 별로 안 좋아 하고 한식이 먹고 싶어서 자주 안 먹었는데, 가성비의 참맛을 알고 빵만 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궁핍한 교환학생 생활 중 돈을 아낄 수 있게 됐다. 내가 먹었던 빵 중에서 최고의 빵을 골라 보겠다. 1. Pasquier-Brioche tressée. 이 빵은 브리오슈라는 빵 종류인
3월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어 가는 시기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만나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 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 어려운 일들을 해내 곤 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모두가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 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비슷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 은 없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뉴스를 켜면 서로 생각이
3월 4일. 2025년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날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고향에서는 눈이 오는 모습을 보는 것도 어려웠기에 3월에 눈이 내리는 모습은 살면서 처음 봤다. 그래서 2학년 1학기의 개강은 왜인지 “아 그때 3 월인데 눈 내렸잖아”라는 말과 함께 오랫동 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디선가 어릴 적의 기억은 대부분이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오랫동안 기억되지만, 자라날수록 비슷한 경험들이 반복되기 때문에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어릴 적 아빠와 함께 세발자전거에서 보조 바퀴를 다 뗀 후 두발자전거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중에도 우리나라는 물가가 지속해서 상승했다. 이와 더불어 해당 기간에 최저임금도 동결된 적이 없었다. 비용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세상이 됐다. 교육과 지성이라는 굴레는 돈 벌이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암묵적 가치가 드디어 한계를 보인 것이다. 학교는 지속적인 물가 상승과 사회경제적 기준의 변화 안에서 ‘지성의 장’이라는 그 위엄과 무게에 갇혀 있었다. 이는 학교가 재정적인 변화를 꾀하기 힘들게 했다. 결국 경제 환경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대학교의 재정과 등록금 인상 간의 괴리는 곪아버린 환부가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펜을 잡는다. 우연한 계기로 나에게 찾아온 기회이기에 욕심이 생겨 글감을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다. 예전에는 심심치 않게 떠올랐던 여러 생각들이 이제는 들지 않는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핑계로, 대학교에 서는 놀기 바빠 책을 멀리했다. 내 손에는 책 대신 핸드폰이 자리 잡았고 그렇게 내 생각 은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잠깐 스쳐가기는 했을 것이나, 그조차 오래가진 못했다. 그저 남들이
숭실에서 첫 학기는 새로 나를 소개해야 하는 시기였다. 차례를 기다리며 입으로 굴려본 말들은 뻔해서 재미가 없거나 과해 다 삼켜버렸다. 내 차례에 왜 “성심당에서 왔어요”라고 소개했을까. 희미하게 웃는 소리,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유쾌한 소개와 함께 새로운 환경과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내용을 빌리려 한다. 소설에 나오는 가족들은 심시선 여사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타 칭 모계사회 가족이다. 이야기는 여사의 사망 10주기를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