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하는 “정주(定住, Wohnen)”는 단순히 특정한 장소에 거주하는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는 “정주”를 인간이 이 세계에 의미 있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끌어올린다.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정주”는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한다는 물음의 근원에 놓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주”의 가능성이 집을 짓는 행위—건축(Bauen)—의 바탕이 된다.

  하이데거에게 “정주”는 대지와 하늘, 신성한 것과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이 조화롭게 겹치는 상태이다. 이런 요소들이 균형 있게 얽혀 세계에 대한 돌봄을 품고 살아가는 시적 삶의 조건이 된다. 건축은 여기서 단순한 기술적 행위가 아니라 이 “정주”의 방식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이다. 진정한 ‘집 짓기’란 기능 중심의 객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주”가 가능하도록 ‘장소를 보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근대 기술 중심의 주거 개념—효율과 기능을 중심으로 삼는 태도—은 세계의 신성함과 “정주”의 깊은 의미를 품지 못한다. 세계는 자원으로 환원되고, 인간은 대지(大地)로부터 소외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건축적 사고에서 크리스티안 노르베르크-슐츠(Christian Norberg-Schulz)의 “장소의 혼(Genius Loci)”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교외의 목가적 주택에 대한 동경, 흙냄새와 정원, 오랜 이웃 관계에 대한 그리움은 현대 도시의 각박한 삶에서 벗어나 대지와 관계하고자 하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주”의 의미는 언제나 안정과 평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익숙한 장소가 주는 귀속감은 때로 변화에 대한 불편함으로 이어지고, 과거가 만든 경계는 배타적 공간 질서를 강화하기도 한다.

  한편, 하이데거와 다른 사유를 펼치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유목(遊牧, Nomadism)”의 개념을 통해 현대적 삶을 비춰낸다. 그들이 말하는 “유목”은 단순한 이주나 불안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목”적 삶은 끊임없는 ‘영토화(領土化)’와 ‘탈영토화(脫領土化)’의 순환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공간을 짓는 창조적 운동이다. 고정된 틀에 머물지 않고 ‘어떤 것 되기(Becoming)’를 통해 기존 질서를 넘어서려는 역동적인 사유 방식이다. 변화하는 도시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에게 이러한 “유목”적 사고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정주”와 “유목”을 선명하게 대립하는 단순 구도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정주”가 시적 삶의 가능성을 품는 만큼, 폐쇄적 공동체성과 배타적 장소의 애착으로 쉽게 변질될 수 있다. 반대로 “유목”은 불안정한 이동처럼 보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에겐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저항적 힘이 된다. 다시 말해 “정주”와 “유목”은 각각 돌봄과 고착, 창조성과 불안정의 이질적인 가치가 함께 드러나는 사유와 삶의 방식이다.

  이 양면성을 염두에 둔다면 현대 도시와 주거 문제는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의 아파트 거주 현실은 이러한 사유의 틀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흐름에 따라 수년 단위로 이사하며 사는 삶은 일종의 도시적 ‘유목성’을 드러내지만, 그 이동은 새로운 공간을 영토화하고 탈영토화를 반복하는 “유목”의 창조성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부동산이라는 자원 중심의 관점 속에서 단일한 가치로 치환된 중성적인 ‘집’과 마주한다.

  피상적인 “유목”의 도시엔 한때 나를 품었던 아파트를 철거하는 현수막은 이제 재개발을 알리는 축포이자 장밋빛 미래로 가는 청사진이다. ‘부자 되기’를 위한 순간적 머무름과 사적 자원으로서 ‘집’에선 존재론적 가치를 지닌 “유목”도 “정주”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리듬과 사유 구조 그리고 권력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한 “유목”의 삶과 한국의 아파트는 거리가 너무 멀다. 오히려 자본의 집단적 주술에 방향을 잃은 맹목적 이동은 다른 모든 가치 있는 것을 집어삼킨다.

  유럽인의 사유에서 비롯된 “정주”와 “유목”의 개념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과 존재 방식을 말해왔다. 20세기의 전위적 건축가들 역시 이 두 개념을 각자의 방식으로 실험하며, 건축을 통해 삶의 모습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흥미로운 것은 두 개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현대 세계가 구축한 도구적 합리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인의 주거 현실은 이 두 개념 어디에도 온전히 귀속되지 않는다. 전원주택과 아파트라는 단순한 비유와 이분법 너머에서, “정주”와 “유목” 사이 혹은 그 바깥에 놓인, 아직 정의되지 않은 한국인의 ‘집’은 어떤 의미와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을까. 플랫폼 자본과 데이터 기반 시설이 뜨겁게 요동하는 우리 시대 건축에 더욱 진지하게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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