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러운 공공의 권고처럼 “적정 온도”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 수치들은 일상생활의 기준이 되고, 마치 오래 검증된 과학적 합의처럼 변화하는 절기의 온도 ‘표준’이 된다. 그러나 그 기원을 더듬어 보면, 이 “적정 온도”는 단순한 생리학적 지표가 아니라 근대 과학과 제국주의가 함께 만들어낸 역사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19세기 유럽 제국들은 열대 식민지, 제국의 병영에서 군인인 백인 남성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쾌적성과 체온 변화에 관한 실험을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특정 온도를 ‘표준’이라 규정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하는 “정주(定住, Wohnen)”는 단순히 특정한 장소에 거주하는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는 “정주”를 인간이 이 세계에 의미 있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끌어올린다.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정주”는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한다는 물음의 근원에 놓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주”의 가능성이 집을 짓는 행위—건축(Bauen)—의 바탕이 된다. 하이데거에게 “정주”는 대지와 하늘, 신성한 것과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이 조화롭게 겹치는 상태이다. 이런 요소들이 균형 있게 얽혀 세계에 대
푸른 꿈을 안고 마련한 건축 책을 몇 페이지 넘기다 보면 다양한 기둥과 변천을 보여주는 그림들로 가득하다. 도리안, 이오니아, 코린트, 튜스칸처럼 집을 만드는 기둥에 관한 관심은 유럽의 고전 건축을 상상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고정된 출발점이다. 건축물이 중력과 바람 등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들을 이겨내는 데 필수적인 기둥, 그러나 20세기 초 시작된 근대주의 건축에서 기둥은 양식과 장식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한 시스템과 구축의 사고로 진화한다. 이 사고의 정점에 1914년에 등장한 도미노(Dom-ino) 이론이 있다. 최소한의 기둥으로
유럽과 북미, 일본의 도시와 건축에 관한 서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그 원인을 건축이나 도시 담론 자체에서 발견하기보다 유럽 지성 사유의 변화에서 찾아보는 것이 때론 더 흥미롭다. 문명의 최전선이라 자부했던 유럽과 두 번의 세계대전, 대규모의 살상과 비인간화를 초래한 비극의 원인을 고민하고 치유해야 하는 엄중한 시간을 전후 유럽 사회는 마주해야만 했다. 에릭 프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테어도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과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탈근대론,
건축 스튜디오가 있는 문화관 복도를 걷다가 가끔 “실무적인 건축”이란 말을 어깨너머 들을 때가 있다. 특히, 학벌과 인맥으로 해가 갈수록 견고해진 건축 취업 시장에서 “실무”가 원하는 교육을 스스로 구하려고 하는 욕망의 구조가 학교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과연 무엇이 그렇게 실무적이란 걸까? 건축 업계에서 진행되는 “실무” 방식은 20세기에 수입된, 면적과 프로그램을 합리적으로 담고 도면제작을 당연시하는, 대상화되고 객관화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실무”가 된 지 오래다. 흔히 한국에서 전문가 교육으로 진행되는 건축교육은 주로
한때 대중 미디어에서 “학교는 감옥이다”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입시 지옥으로 변한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짚음과 동시에 이를 가능케 하는 물리적 실체, 학교 공간 자체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영향인지 이후 지어진 많은 학교 공간은 외견상 최소한 색다르고 흥미로운 공간들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록달록한 실내와 아기자기한 외부로 통하는 공간, 하지만 여전히 수능과 대입을 위한 욕망이 지배하는 학교, 정말 새로워졌을까? 학교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근대화가 수입한 흥미로운 효율이 내재해 있
매일 아침 동작대교를 건너며 마주하는 한강의 풍경, 아파트 단지 공사장의 타워 크레인은 오늘도 지칠 줄 모른다. 병풍처럼 늘어선 2세대 강변 아파트들을 재생산하는 모습. 더 높아지고 촘촘해진 무채색의 열주, 지난 세대 넓적한 판상 아파트를 대신해 세워지는 더 두텁고 훌쩍 높아진 부의 성벽이다. 재건축되는 한강 변 도시 풍경과 함께 “한강 르네상스”라는 말이 오랜 기간 꾸준히 표어로 등장한다. 요즘 다방면에서 차용되는 “르네상스”는 대체 어떤 욕망이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다시 태어났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주로 긍정
요즘 한 OTT 서비스를 통해 K-Pop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화제다. K-Pop Demon Hunters, 세칭 “케데헌”으로 통하는 영어와 한국어로 만들어진 영화, 캐치(Catch)한 K-Pop을 중심으로 예상치 않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 영화의 제작과 자본을 담당했지만, 감독부터 주요 인물 목소리 역할에 북미의 2세대 한인들이 참여했다고 하니 K-문화의 또 다른 세계화 모습처럼 보인다. 특히 영화 속 서울을 배경으로 전통 민속 소재가 등장하는, “한국적” 모티브가 전 세계인에게 어필하는 모습이
건축(建築)”을 공부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개별 사물로 건축물이 가지는 심미적이고 기능적인 시각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진다. 어떤 건물이나 공간적 조직이 속하던 당대의 사회 문화와 실현을 가능하게 했던 경제 정치적인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앎의 확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에 대한 더 넓은 생각의 중심에는 항상 “도시” 에 대한 학습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럼 과연 우리가 일상어로 흔히 쓰는 “도시”란 무엇인가? 이 단순한 질문을 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도시는 고을을 뜻하는 도(都)와 시장을 뜻하는 시(市)가
글로벌 관광의 시대, 유럽여행이 대중화된 지금 로마를 여행하는 건 아직도 특별하다. 고대 문명의 유적이 도심 곳곳 발끝에 널려 있는 도시, 돌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그래 서 지금도 우리에게 전달된 2000년 전 유적을 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기념비”라 할 만하다. 그런 로마에서도 판테온은 여러 유적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반쯤 무너진 콜로세움과 달리 판테온은 장구한 세월을 이겨내고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콘크리트로 지어 진 판테온, “판(pan)”은 모두를 뜻하는 접두어이고 “테온(theon)”은 신성 혹은 초월
지난달 서울 시내 모 건축대학의 렉쳐시리즈에 초대받아 다녀온 적이 있다. 학생들 주도로 필자를 초대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들어 보니 몇 년 전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RIBA)에서 출판된 필자의 “서울 방 (Seoul Bang, Urbanism between Infrastructure and the Interior)”을 렉쳐 준비 모임에서 읽고 초대하게 됐다고 한다. 그들의 재기발랄하고 자발적인 주도에 흔쾌히 응하기로 했다. 기왕 초대받은 김에 강연 당일 일찍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이 대 학 캠퍼스가 최근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해 전 친구인 멜라니 후난 교수의 초대로 독일 드레스덴 대학 학기 말 설계 리뷰를 다녀온 적이 있다. 도시 설계 스튜디오였는데 체코 공화국의 한 도시를 중심으로 드레스덴 학생들이 산업화 시대 방치된 대규모 도시 시설을 재생하는 다양한 노력을 볼 수 있었다. 요즘 도시 프로젝트 리뷰에 가 보면 거의 단골처럼 녹지를 도입해 거대 유휴 시설을 다양하게 재생시킨 설계안을 볼 수 있다. 이런 도시 녹지화 프로젝트의 대표작으로 1999년 시작된 뉴욕의 하이라인(High Line)이 유명하다. 뉴욕 하이라인은 폐철도를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고
주거와 상가가 수직으로 합쳐진 건물을 주상 복합 건물이라고 한다. 이 방식은 고밀도 도시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직으로 쌓아서 급속한 인구 증가를 수용하고 도시 생활을 3차원으로 조직하는 방식이다. 광화문 광장과 종묘 사이 지하철 종로3 가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돈화문로와 삼일대로가 교차하는 십자로 한복 판에 대표적인 주상 복합 건물, 낙원 삘딍1)이 있다. 60년대 후반 완공된 이 흥미로운 건물은 자동차가 거침 없이 달리는, 붐비는 도로 한가운데 서 있다. 사실 도로를 막은 것이 아니라 프란시스코 고야의 사투르누스처럼 자동차를
요즘 노량진 수산시장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불평의 소리는 주로 바가지를 쓸 위험이 클 수 있다는 경고인데 듣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0여 년 전만 해도 서울 한복판에서 신선한 회를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대중교통의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찾 아가던 노량진 수산시장이 아니던가! 현대화된 건물이 지역의 풍경을 이렇게 변화시켰다는 게 한편 씁쓸하기까지 하다. 지금도 학교에서 20분 남짓 501번, 506번, 750번 등 노량진 수산시 장으로 향하는 버스는 여럿 존재한다. 과거 거친 콘크리트 대공간을 중
18세기 유럽이 맞이한 근대화 과정에서 태어나 19세기 산업혁명과 도시화를 거치며 적극적으로 체계화된 “사(私)적 공간”과 “공공(公共) 공간”에 대한 논의가 최근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요즘 학기말 건축 전시회를 가 보면 현대 도시와 건축 경향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이런 사회적 개념을 최대한 자신의 디자인에 반영하려는 학생들이 많다. 여기서 빠지지 않는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것이 공동체와 공공성에 대한 건축적 상상이다. 반대로 이들 작업에서 사적인 도시공간을 새롭게 정의하거나 개인적 영역을 반영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학생은 거
고대 중국에서 행정과 군사의 의미로 다르게 쓰였던 한자어 도시(都 市)란 말이 이천 년도 넘은 세월을 지나 다시 부활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19세기에 근대적 지식과 함께 수입된 외래어 City에 대응하는 말로 선택됐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과거 행정 경계인 “도(都)”가 무역과 상업으로 대표되는 “시(市)”와 결합되는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으로 표현되는 상업과 자본 역사 가 자유 정신을 동반하고 근대 시민 사회를 지탱하는 주체의 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Civitas와 가장 가깝게 접근된 관점을 이 한자어가 포용하고 있
간혹 우리는 관상 보듯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서 그 사람의 여 러 다른 모습을 판단하거나 추론하 곤 한다. 집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 할까? 우리가 배우는 “건축”의 전통 에서는 건물의 △앞면 △측면 △배면 등을 입면(elevation)이라 부르고 특히 집의 얼굴이 되는 면을 프랑스어를 빌려 파사드(façade)로 칭한다. 여기서 많은 한국의 건축학 프로그램은 예술적 비례와 균형 잡힌 구성으로 완성된 입면을 당연시하고 이를 위한 도면 그리기를 필수 과정으로 삼는다. 이런 입면 그리기의 전통은 과거 유럽 건축교육에서 17세기에 이르
올해 아카데미상 10개 부분 후보에 올랐던 부르탈리스트(The Brutalist, 2024)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요즘이다. 75년 전 영화 속 인물인 건축가 하워드 로악(Howard Roark)의 영웅적 작업과 삶을 다룬 파운티헤드(The Fountainhead, 1949) 이래로 대중에 게 주목받으면서도 심도 있게 볼 수 있는 “건축가” 이야기가 장장 3시간 반 넘게 펼쳐지니 이 분야에 몸담고 있는 나 또한 꼭 봐야만 하는 영화가 됐다. 단 이 영화는 드물게 중간에 쉬는 시간(intermission)이 있으니 참고 하길
AI를 중심으로 한 지식 산업의 변화와 이에 대응하려는 교육, 문화계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지난달 28일(금) 개강교수 회의를 비롯해 교내에서도 이 흐름에 대응하려는 준비가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 (Artificial)과 지능(Intelligence)을 합친 조어(造語)가 성장하며 펼칠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새롭게 도래할 미래 사회의 모습이 어떨까 기대된다. 20세기 전반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내용과 의미가 우리의 현실의 쓰임새와 불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