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토) 관악구 박종철센터 앞이다. ‘광주는 살아있다’는 문구가 있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지난 18일(토) 관악구 박종철센터 앞이다. ‘광주는 살아있다’는 문구가 있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1980년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던 날로 오늘날 민주화가 이루어진 데 큰 주축이 되는 날이다. 그 이후로도 노태우 정권 당시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언론기관 통폐합 문제 등을 조사하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열렸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 탄압이 벌어졌다. 

  본교 국어국문학과 학생이던 박래전 열사는 탄압에 맞서 진실을 알리고자 분신했다. 많은 학생들이 알지 못하지만, 본교 국어국문학과의 슬로건인 ‘동화 국문’은 박래전의 시 ‘동화’에서 유래됐다. 하지만 그의 기념비는 교내 구석에 작게 위치해 있어 학생들이 찾기 쉽지 않다. 본지는 이러한 박래전 열사를 기념하고자 지난 18일(토) 관악구 박종철센터를 방문해 박래전 음악극에 참여했다.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했던 박래전 열사의 일생과 그날을 알아보자. 

박종철센터 지하 소강당이다. 당일 음악회를 보러온 시민들로 가득하다.

  본 기자는 음악극을 보기 위해 박종철센터를 찾았다. 그 앞에는 ‘광주는 살아있다’는 현수막과 박래전 음악극 포스터가 게시돼 있었다. 관악구에 위치한 박종철센터는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들을 계승하기 위해 세워졌다. 

  음악극은 박종철센터의 지하 소강당에서 진행됐다. 그곳은 강당이라고 부르기엔 협소했지만, 강당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맨 앞 무대에는 이야기를 전해주실 강독사 한 분과, 노래를 연주하고 불러주실 음악가 두 분이 계셨다. 본격적인 음악극 시작 전, 강독사 김현아는 “어떤 언론도 말해 주지 않는 그 날의 진실을 또박또박 말하며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며 “여러분들께서 직접 강독사가 되고, 그날에 참여해 주기를 요청합니다”라고 전했다.

음악회에서 노래와 연주가 진행되고 있다.
음악회에서 노래와 연주가 진행되고 있다.

  음악회는 강독사의 박래전 열사의 일생에 대한 설명과 노래, 시 낭독으로 진행됐다. 김 강독사는 먼저 박래전의 일생에 대해 노래 형식으로 읊조리며 알려줬다.

  “1963년 4월 17일 박래전은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형 박래군이 있었다. 어린 박래전은 그런 형 박래군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의 부모님은 농사일을 하고 오일장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며 가난하지만, 열심히 일하셨던 분들이었다. 부모님 덕분에 박래전은 가난할지라도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또한 부모님의 극심한 노동을 기억하는 청년으로 자랐다”

  이후 현장에서 박래전의 형 박래군 씨는 박래전의 시 ‘손씨’를 낭독했다. 손씨는 자식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시다. 낭독이 끝난 후 강독사는 어린 시절 박래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설명해 줬다. 어린 박래전은 형들이 학교에 가고 혼자 심심할 때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가게를 찾아갔다. 그는 인사성이 밝은 장난꾸러기 막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옳다는 일에 대해서는 굽힐 줄 모르는 총명하고 의리있는 사람이었다.

  순종만을 미덕으로 알았던 형제는 학교 공부를 제쳐두다시피 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뛰어들게 됐다. 형제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던 거대한 손을 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을 가난에 찌들게 하고,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논밭으로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우리 또래의 젊은이들은 공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도 신음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억압이었다. 

  강독사의 말이 끝나고 가수 김원중의 노래 ‘바위섬’이 시작됐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라는 가사는 당시 바위섬처럼 고립돼 있던 광주의 모습을 드러낸다.

박래전 열사의 형 박래군 씨가 박래전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박래전 열사의 형 박래군 씨가 박래전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노래가 끝난 후 김 강독사는 형 박래군에게 쓴 박래전의 편지를 낭독했다. 

  하나의 계기가 주어졌다고 해서 뛰쳐나가고 전방이 불투명하니 뒤로 물러서 기다리라는 것은 비겁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그러했다면 인간이 지금처럼 진보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며 현재의 인간이 그러하다면 형이나 내가 바라는 사회는 진보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내겐 나의 길이 있다. 부끄러운 얼굴로 캠퍼스로 돌아갈 것이고, 열심히 뛰고 부대끼며 살아갈 것이다. 비록 부모님께 또다른 아픔을 줄지 언정 내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 어둠 속에 밝아오는 불빛 속에 하나가 되어 나는 함께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1987.1.4. 동생 래전 씀.

  다음으로는 본교 인문대 황명연(사학·22) 학생회장이 참여해 박래전의 시 ‘비’를 낭독했다.

본교 인문대 황명연 학생회장이 박래전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본교 인문대 황명연 학생회장이 박래전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초라한 사내가 길을 간다 / 기다란 전신주 그림자를 밟으며 / 빗물에 비쳐드는 수 없는 빗줄기 속으로 / 비틀린 입술을 파랗게 질린 얼굴에 떠올리며 /  이는 웃음을 지으며 / 겨울비 속을 간다

  -이 비 내린 후면 / 살을 에는 추위가 시작되겠지 / 친구는 무얼 할까 / 차디 찬 땅속에서 모진 비를 피하며 / 비틀거리는 웃음을 지을까 / 짓눌린 붉은 흙 밑에서 / 내 친구는 아직도 자유를 비웃으며

  넋 나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까 / 지금은 알지 못하는 이가 몸을 누이고 있을 / 낡은 추녀 밑을 돌아 / 꾸부정한 사내가 비틀비틀 / 끝없는 도시의 빗속을 걸어간다 / 누렇게 뜬 얼굴에 / 절뚝이는 웃음을 떠올리며

시 낭독이 끝난 후, 박래전의 시 ‘동화’에 노랫말을 붙인 노래 ‘겨울꽃’을 관객들과 함께 불렀다.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동화는 겨울에 피는 꽃이다. 동화는 본교 박래전 열사 기념비 후면에도 새겨져 있다. 또한 현재 본교 국어국문학과의 슬로건인 ‘동화 국문’에도 그의 시 제목이 등장한다.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 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동화(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본 음악극에서 가장 마음이 뜨거워졌던 순간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왔을 때다. 관객들 모두 손을 치켜들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오며, 관객들이 손을 치켜들고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오며, 관객들이 손을 치켜들고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중가요다. 강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을 때 마치 그 항쟁의 현장에 들어간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강당에 메아리치던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시민들은 스스로 강독사가 돼 박래전 열사의 유서를 낭독했다. 그의 유서에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 죄송스러우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는 당시 박래전 열사의 심정이 담겨 있었다.

  제가 아니면 더 많은 어머님, 아버님들의 가슴을 에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불을 지르거나 몸을 던지면서 죽어갔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의, 사랑스러운 두 분의 아들의 목숨을 민주의 성단에 바쳐야 합니다. 

  음악회가 마지막에 다다르며, 김 강독사는 참석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1980년 5월 18일의 현장에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계신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또 요청한다. “당신의 손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그려주십시오” 음악극 시작 전 박래전 열사의 동화와 노래 겨울꽃이 적힌 종이와 백지의 종이를 받은 바 있다. 백지인 종이는 김 강독사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적었다. 첫 번째 질문에 시민들은 ‘우리 함께 싸웁시다. 저들이 우리를 죽인다 해도 함께 싸우면 우리의 투쟁은 헛되지 않을 겁니다’, ‘함께 거리로 나아갑시다’, ‘살아야 합니다. 살아서 계속 싸워야 합니다’ 등 1980년 5월 18일의 사람들에게 응원과 투쟁의 메시지를 보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외부에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는 모습’, ‘손을 치며드며 나아가는 모습’, ‘빈 주먹만 쥐고 벌벌 떠는 모습’ 등이 그려졌다. 당시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맞서며 나아갔지만, 또 두렵기도 했던 그날의 풍경을 보여줬다. 

  음악극이 끝난 후 박종철센터 이현주 센터장이 앞에 나와 이야기를 전했다. 이 센터장은 박종철 열사와 동문이며 본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본교 동문이기도 하다. 이 센터장은 이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말을 열었다. 이어 “박종철이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선한 사람이었다면, 박래전은 가장 뜨거운 사람이었다. 또한 날 가장 부끄럽게 만들었던 사람이 박래전 열사였다”고 전했다.

박종철센터 이현주 센터장이 앞에 나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센터장은 1980년대 박래전 열사와 몇 차례 같이 학생 운동을 한 일화를 들려줬다. 이 센터장은 “첫 번째 시위 당시 박래전이 맨 앞에서 현수막을 들고 서울대에서 여러 대학과 연합해서 시위를 했다. 그런데 박래전 열사가 현수막을 내리치며 ‘서울대에서 이거밖에 못해?’ 하며 화를 냈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순간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한다.

  당시 박래전 열사가 분신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가, 내가 너무 잘못해서, 너무 절망해서, 힘을 보태주지 못해서 그런 생각을 하신 거 아닐까 하는 죄책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 센터장은 나지막하게 마지막 말을 건냈다. “그럼에도 드는 생각이 있다”며 “그래도 살았어야지라는 생각이 여전히 든다. 그래도 살았어야지, 그래도 살았어야지...”

본교 중앙도서관과 미래관 사이에 위치한 박래전 열사의 기념비다.
본교 중앙도서관과 미래관 사이에 위치한 박래전 열사의 기념비다.

  음악회가 끝나고 △박래군 씨 △이 센터장 △본교 동문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모두 19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며 오늘날의 민주화를 위해 힘써준 사람들이다. 이후 본교 열사들의 기념비를 찾았다. 열사들의기념비는 일반 학생들이 찾기 어려운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박래전 열사의 기념비는 중앙도서관과 미래관 사이에 있다. 매년 6월 6일이면 본교 국어국문학과는 박래전 열사가 안장된 모란공원에서 추모식과 ‘유월제’ 를 진행한다고 한다. 본 기자도 숭실 후배의 도리로써 감사하는 마음으로 옛 열사들을 기린다. 그날의 뜨거운 외침을 마음에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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