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에서 첫 학기는 새로 나를 소개해야 하는 시기였다. 차례를 기다리며 입으로 굴려본 말들은 뻔해서 재미가 없거나 과해 다 삼켜버렸다. 내 차례에 왜 “성심당에서 왔어요”라고 소개했을까. 희미하게 웃는 소리,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유쾌한 소개와 함께 새로운 환경과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내용을 빌리려 한다. 소설에 나오는 가족들은 심시선 여사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타 칭 모계사회 가족이다. 이야기는 여사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고인이 본격적인 인생을 시작했던 하와이에 퓨전 제사를 위해 떠나며 시작된다. 어머니이자 할머니의 젊었을적 정취를 찾아간 하와이에서 가족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환영받는다.

  손자인 규림은 자신을 뺀 가족 모두 영어에 능숙한 상황이 답답했다. 규림은 그 속 에서 길잡이 도구로 서핑을 선택했고 파도를 통해 한껏 환영받는다. 다들 앞서가는데 나만 멈춰있는 것 같아 울적해지는 경험은 살아가며 흔히 가져본 경험일 것이다. 시험도, 언어도, 심지어 독서량까지 남들과 비교하며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기웃 대며 산다. 규림은 언어에 주눅 들지 않고 파도를 통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환영받기를 택했다.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환영해 줘야 할 때인 것 같다. ‘이래서는 어디 내놓지도 못하겠어’라는 말은 나 자신이 아니라 아침에 만든 망한 계란 후라이에나 할 수 있게.

  손녀 화수는 한 직원이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애꿎은 다른 직원에게 염산 테러를 한 사건의 피해자였다. 사람들은 피해를 당한 화수가 아니라 크게 억울하다고 외치며 여직원들을 해친 가해자에 이입한다. 화수는 여성에게 더욱 차갑던 시대에도 꼿꼿하면서도 물렁하게 소신을 밝히며 살았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상처를 지워나간다. 사람들은 모두 응축된 스트레스를 지고 살아가고, 그 농도가 짙은 사람들이 때로 그 감정을 터트리곤 한다. 하지만 그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튈 때가 있다. 그 잘못에 정확 한 지적을 보내고 함께 화내는 것도, 화수 같은 사람들이 다시 사회의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방식의 환영이 상처를 아예 없애진 못하더라도 흐려지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내 환영에 대한 기억도 돌아봤다. 1학기 어느 한낮에 동기와 캠퍼스를 걸으며 “우리 이렇게 걷고 있으니 진짜 새내기 같지 않냐”며 웃으며 “내년에는 못할 테니 올해 신입생티 팍팍 내면서 다니자”라고 했던 게 몇 달 전. 벌써 종강을 앞두고 있다. 올해는 ‘환영한다’는 말을 많이 들 었다. 입학한 것을, 학과에 온 것을, 동아리에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한다’는 오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한다는 뜻이다. 남은 2024년도, 새로 맞이할 2025년에도 날 선 분노는 환영(幻影)으로 남기자. 대신 서로와 우리 스스로에게 큰 환영(歡迎) 을 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