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 장강명의 『산 자들』 (2019) 읽기

살아남기 시리즈, 이번엔 자본주의다!

한때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라는 만화책이 유행했었다.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만화였다. 이는 곧 많은 인기를 끌었고, 이후 아마존, 사막 등 다양한 곳에서 살아남는 만화들이 이어서 출판되었다. 그시절 그 만화책을 읽던 아이들은 어느덧 어른이 되었고 살아남기 시리즈 또한 어른들을 위한 살아남기 시리즈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게 새로 시작한 살아남기 시리즈에 수록된 작품이 바로 장강명의 『산 자들』(민음사 2019)이다. 살아남기 시리즈의 핵심은 무인도나 아마존과 같이 특정 테마에 대한 생존기라는 것인데 『산 자들』 또한 그렇다.

『산 자들』은 장강명의 연작소설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해왔던 연작소설과는 결이 다르다. 보통 연작소설이라고 하면 같은 인물들이 이야기를 달리하여 계속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장강명의 연작소설은 그렇지 않다. 10편의 이야기 중 같은 인물이 등장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장강명은 왜 『산 자들』을 연작소설이라 칭한 것일까? 이는 수록된 단편 중 「음악의 가격」에 등장하는 소설가의 말을 참고해 볼 수 있다. 작중 소설가는 다른 인물에게 연작소설은 "작품 하나하나는 독립적인데 그게 모여서 어떤 테마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 소설가가 장강명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인물이라고 본다면 장강명에게 연작소설은 인물들을 공유한다기보단 어떠한 테마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 자들』에서 공유하고 있는 테마는 무엇인가? 바로 '자본주의'이다.

『산 자들』의 인물들은 취업, 해고, 구조조정, 자영업, 재건축 등 모두 '자본주의'가 만든 모순 또는 갈등 아래 놓여있다. 또한 기자 출신 작가라는 게 물씬 느껴지는 '르포' 스타일의 문체로 쓰인 이야기는 마치 생존기를 읽는 듯하다. 따라서 『산 자들』은 엄연히 자본주의라는 테마에 대한 생존기인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로 볼 수 있다. 또한 서바이벌이 인물이 처한 상황에 따라 생존방식이 다른 것처럼 『산 자들』에서도 인물이 자신의 계급 위치에 따라 생존방식이 다르다. 『산 자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구체적인 생존방식은 다 다른데 이는 자신의 경제적 토대에 따라 생존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장강명은 10편의 단편소설을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라는 큰 틀로 나누는데 이는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한 3가지 생존 법칙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라는 순서는 계급의 층위에 따른 생존 전략의 순서로 보인다. 즉 계급 체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은 '자르기'를 통해서 생존하며, 그보다 아래에 있는 인물은 '싸우기'를 통해서 생존하며, 남은 인물들은 '버티기'를 통해서 생존한다. 자신의 토대에 따라 상부구조가 결정되는 자본주의 체계에선 생존 방식조차 계급화된다. 자 그러면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생존 제1법칙 - 자르기

자본주의에 살아남기 위한 제1법칙은 '자르기'이다. 이 법칙엔 세 가지 생존기인 「알바생 자르기」, 「대기발령」, 「공장 밖에서」가 있다. 이들은 '자르기'라는 생존 전략을 통해 살아남는다. 「알바생 자르기」에선 중간 관리자가 알바생을 '직접' 자르기를 통해 생존하며, 「대기발령」과 「공장 밖에서」에선 다른 동료들이 잘려야 자신이 생존할 수 있기에 동료가 부당하게 잘려도 이를 묵인하는 '간접'적인 자르기를 통해 생존한다. '자르기'라는 전략은 마치 지배층만이 가능한 전략으로 보이지만 앞서 말했듯, 오늘날 중간 관리자의 계급에서는 직접적으로 자르기가 가능하며 관리자 계급이 아니더라도 지배층의 자르기에 묵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르기에 공모하곤 한다. 「알바생 자르기」는 세 단편 중 직접적인 자르기에 해당하는 생존기로 생존 법칙으로의 '자르기'를 잘 보여준다.

「알바생 자르기」에서 가장 먼저 짚고 가야 할 점은 독자의 계급 위치에 따라 오독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신의 계급이 높아 관리해야 할 하위 계급이 많을수록 은영의 입장인 관리자의 입장에 과몰입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초고에는 마지막 문단인 혜미 시점의 이야기가 없었는데 초고를 읽은 몇몇 사람이 '교활한 서민층 어린애한테 걸려 고생하는 착한 중산층 여자 이야기냐'는 반응에 당황한 작가가 뒤늦게 추가했다고 한다. 「알바생 자르기」는 중산층 여자가 교활한 서민층 어린애한테 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중산층 여자가 자신의 부당한 '자르기'를 합리화하는 이야기이다. 비합리적 자르기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하나하나 따져본다면 비합리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혜미를 자른 가장 큰 이유는 비용 절감, 즉 자본의 불필요한 손실을 막기 위함이다. 혜미가 하는 일은 4시간이면 충분히 끝낼 일이다. 그렇기에 일하고 남는 근무 시간에 뮤지컬이나 일본 여행을 웹서핑하고 145만원을 받는 혜미를 자르고 새로운 알바생을 뽑아 오전 4시간만 근무시킨 후 75만원을 주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확실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렇게만 본다면 혜미는 잘릴 만하다. 그러나 혜미는 자본의 손실 때문에 잘린 게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 이유일 뿐이다.

합리적이라고요...... 과장님, 지난달에 태국 바이어들 왔을 때 환송회 한 거, 제가 영수증 정리하다 보니까 일차 밥값만 제 월급보다 더 나왔던데요. 그 환송회에 서울 사무실 직원들이 다 갔잖아요. 사장님 오신 다음에 그런 식으로 회식을 몇번이나 하셨잖아요. 그것도 합리적인가요? (33면)

자본의 손실로 인해 혜미를 자른 것이었다면 혜미 월급보다 더 많이 드는 회식을 그렇게 자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교환가치'의 논리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여겨지니까 '자르기'에 정당성을 얻기 위해 이를 표방한 것일 뿐이다. 독자들은 이러한 표면적 논리에 넘어가 오독하여 혜미가 잘 잘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혜미가 잘린 근본적 이유는 다름 아닌 사장의 '위계질서 정립' 때문이다.

외국인 사장이 독일 본사로 돌아가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장이 되었기에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하위 계급들에게 재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은영의 생각처럼 사장은 자기에게 그럴 힘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계급적 힘을 과시하기 위해 고민하던 사장에게 혜미가 떠오른 것이다. 회사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아 편들어줄 동료가 없었고 성실하지도 않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아 보이는, 누가 와도 대체할 수 있는 업무를 하는 알바생이었던 혜미는 '위계질서 정립'을 위한 좋은 희생양이었다. 사장은 계급 구조를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해 혜미를 자르고자 했으며 은영은 그러한 계급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에 응한 것이다. 여기서 은영은 혜미가 회사에서 하는 역할이 어느정도 필요함을 알면서도 구태여 말하지 않고 방관한다.

장부 보고 잔일 해 주는 사람은 한 명 정도 필요한데 그게 그 아가씨인 거고. 영업직이나 기술직들 보기에는 어딜 나가서 계약을 따 오는 것도 아니고 기계를 고치고 오는 것도 아니니까 이 아가씨는 뭐 하는 사람인가 하지. 이 아가씨가 처세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22-23면)

은영은 혜미가 무엇을 하든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근태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여자아이'라고 부르며 잡일을 시킬 뿐이었다. 사장이 혜미를 자르려고 하자 그제야 혜미에게 관심 갖는다. 그러나 혜미가 부당하게 해고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관심 갖는 것이 아닌, 사장의 '자르기' 명령에 따르기 위해 혜미의 문제에 관심 갖는 것이다.

그래도 은영에겐 약간의 동정심이 있었기에, 혜미를 완전히 자르기보다는 오전 근무만 시키는 '근무 시간 자르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붙임성'에 대해 지적하며 사장의 눈에 마음에 들도록 혜미를 교육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장이 불법파업 규탄대회에 혜미를 보내라고 해서 은영은 혜미에게 말했으나 혜미가 이를 거부하자 은영은 자르기로 결심한다. 협력 업체에서 일하는 알바생이 불법파업 규탄대회에 간다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임에도 이를 거부한 것이 '자르기'를 합리화하게 된다. 은영은 사장에게 보고한다.

여자아이를 해고하고 싶다는 말에 사장은 단박에 찬성했다. 은영이 오전 근무만 하는 알바생을 쓰고, 알바생에게 일을 다 맡기지 않는 대신 다음 연봉협상 때 그 점을 어필하겠다고 제안하자 사장은 제법인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31면)

은영은 혜미를 자름으로서 생존뿐만 아니라, 연봉협상에서 약간의 우위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은영의 생존 전략 '자르기'는 성공하였다.

생존 제2법칙 - 싸우기

'자르기'를 당한 또는 '자르기'를 할 수 없는 하위 계급이 쓸 수 있는 전략은 바로 '싸우기'이다. 이는 마치 하위 계급이 상위 계급과 싸우는 전략처럼 보이지만 하위 계급은 상위 계급과 직접 싸울 수 없다. 하위 계급은 또 다른 하위 계급과 또는 중간 계급과 싸울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싸우기'에 수록되어 있는 생존기 중 「사람 사는 집」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철거민은 재건축에 맞서 싸우며 마치 국가 그리고 대기업을 대상으로 싸우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 대상은 고용된 중간 계급의 철거 용역들뿐이다. 철거민들의 투쟁과는 무관하게 국가는 재건축 사업을 진행하며 사업을 진행할 대기업을 선정하며 선정된 대기업은 용역을 고용하여 철거민을 미뤄낸 뒤 재건축을 시작한다. 철거민들은 그저 용역들 또는 집주인과 싸울 뿐이다.

생존 제2법칙인 '싸우기'는 계급을 전복하기 위한 혁명적 '싸우기'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신과 비슷한 위치의 사람들과의 처절한 '싸우기'이다. 또 다른 단편들인 「현수동 빵집 삼국지」는 빵집 자영업자끼리의, 「카메라 테스트」는 아나운서 지망생끼리의, 「대외 활동의 신」은 대학생끼리의 '싸우기'이다. 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싸우기'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닌 대기업, 즉 상위 계층이다. 이러한 피지배 계층끼리의 싸움, 그리고 그런 싸움에서 지배 계층만이 이득을 보는 것을 노골적으로 그려낸 생존기가 바로 「현수동 빵집 삼국지」이다.

자영업자들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프랜차이즈의 횡포 아래 또 다른 자영업자와 싸운다. 자영업은 회사와 같은 계급적 관계(「알바생 자르기」에서 볼 수 있는 사장-차장-과장-알바생처럼 직급에 따른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닌 프랜차이즈와의 협력적인 동등한 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계급적 관계, 즉 지배-피지배적 관계이다. 프랜차이즈 본사 직원들은 자영업자들을 '사장님'이라 부르며 마치 본사에 지배받지 않는, 오히려 존중받고 협력적인듯한 착각을 주지만 정작 '사장님'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인들처럼 겁먹은 눈으로 예,예, 굽실거리며 지원 인력들의 지시에 따랐다. (123-124면)

프랜차이즈에는 온갖 규정이 있었고 '사장님'들은 이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주영의 가족은 그 규정을 배우고 따르느라 3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그렇게 주영은 B 프랜차이즈의 교육을 받던 와중 이들의 모순을 알게 된다.

B 프랜차이즈는 복잡한 쿠폰 시스템으로 고객을 속이고 그에 대한 책임은 '사장님'들이 지도록 만들었다. 속았음을 알아차린 고객들은 '사장님'에게 분노했고 본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 그러면 본사는 원칙상 '사장님'들의 잘못이라며 이들이 책임지도록 만들었다. 본사는 복잡한 쿠폰 시스템에 대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지만, 원칙에 따른 '사장님'의 책임에 대해선 곧잘 설명해주었다. 이러한 프랜차이즈의 횡포는 지점이 경쟁에 밀려 힘들어질 때에도 드러난다.

개인 빵집과 B 프랜차이즈 빵집의 등장으로 P 프랜차이즈 빵집의 매출이 절반 이상 떨어지자 본사는 이들이 특별팀이 집중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하도록 한다.

하은 모녀는 그 프로그램을 신청하기로 했다. 본사로부터 이벤트 상품과 서비스를 좀더 싸게, 더 많이 제공받는 대신 매장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 계약이었다. 할인 행사를 열면 본사에서 도우미가 왔다. 대신 하은 모녀는 본사가 기획하는 행사를 거부할 수 없었고 제품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본사에서는 판매 데이터를 하은 모녀와 공유하고 인기 상품도 가장 먼저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본사 관리자들이 불시에 매장을 방문해 하은 모녀가 지시 사항을 잘 따르는지 점검할 것이었다. (138면)

하은 모녀는 어쩔 수 없이 본사에 권한을 모두 넘기게 된다. 그래도 본사가 관리한다면 자신들의 떨어진 매출이 오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의 지점이 본사의 신제품 시험장이 되어버린다. 새로 공급되는 신제품들이 많이 팔려도 기존에 잘나가는 빵들은 팔리지 않아 매출에는 큰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본사에서 시키는 일들이 많아 노동의 강도만 심해진다. 그렇게 모녀는 육체적으론 이전보다 힘들어졌지만 수익은 큰 차이가 없자 본사의 전략에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손님들이 손대려 하지 않아 파느라 너무 고생했던 신제품을 본사 매니저가 백 개나 가져왔을 때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다. 본사는 우리의 지점을 살리려는 것이 아닌 최대한 뽑아 먹으려 했음을 말이다. 프랜차이즈 본사는 지점에 대한 책임은 최대한 피하고 이득은 최대한 챙긴다. 렇기에 프랜차이즈 지점끼리 싸운다하더라도 본사는 결코 손해보지 않는다. 오롯이 지점만이, 자영업자만이 손해를 부담하게 된다. 이러한 횡포는 더 나아가 개인 자영업자까지 영향을 준다.

개인 빵집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빵에 대해 진심인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빵 만드는 재료를 아끼지 않았고 진정성 있게 빵을 만들었다. 그러나 프랜차이즈의 효율적인 생산구조를 이길 순 없었다.

"이런 큰 회사에는 빵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연구하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재료비를 덜 들일까, 어떻게 하면 빵을 빨리 굽게 할 수 있을까, 그런 걸 연구한단 말이에요. 그러다보니 자연재료 대신 향신료를 쓰게 되고 빵의 깊은 맛이 사라져요." (152면)

프랜차이즈는 빵 대신 돈에 진심이다. 그렇기에 빵을 얼마나 싸게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만들어야 잘 팔릴지만을 고민한다.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면 빵이 아닌 돈에 진심이어야 한다. 그래서 빵에 진심이었던 할아버지는 폐업하게 된다. 폐업한 후에도 할아버지는 빵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건너편에 있던 P 프랜차이즈 빵집에 찾아가 자신을 기술자로 써달라고 하지만 이조차 프랜차이즈는 거부한다.

"아가씨가 본사에 나를 소개하거나 추천해줄 수는 없소? 내가 제빵 경력이 오십 년이에요. 못 만드는 빵이 없어요. 빵의 달인이지."

"저희 본사 기사로 일하시려면 거쳐야 하는 코스가 있거든요. 저희는 그 코스를 거친 분만 쓸 수 있어요. 아무리 제빵 경력이 길어도 안 돼요. 그리고 본사에서 허락한 빵이 아닌 다른 빵을 저희가 이 매장에서 팔 수도 없어요." (155면)

프랜차이즈 입장에선 빵에 진심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빵에 진심이면 비용보다 빵을 신경 쓰며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으로 만들기에 할아버지와 같은 기술자는 기피 대상이다. 본사는 자신만의 고집, 장인 정신으로 빵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아닌 부리기 쉬운 젊은 여성을 선호할 뿐이다. 그리고 지점은 이러한 본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아가씨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요."

노인이 말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155면)

'사장님'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이들과 '싸우는' 것뿐이다. 그리고 같이 싸우는 이들과 '폐점 시간'과 같이 본사의 이익과 큰 관련이 없는 것들만을 협상할 수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주영과 하은은 살아남기 위해 프랜차이즈의 횡포 아래서 끊임없이 서로 싸울 것이다.

생존 제3법칙 - 버티기

이러한 처절한 '싸우기'조차 할 수 없는 하위 계급도 있다. 이들은 오직 '버티기'말고는 취할 수 있는 생존 법칙이 없다. '버티기'는 말 그대로 버티는 것뿐이다. 「모두, 친절하다」에선 서비스업을 하면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화내지 않고 친절하게 대응하며 버티며, 「음악의 가격」에선 자본주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잘 미끄러질 바랄 뿐이며,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는 부당한 일이 나와는 상관없어질 때까지 그저 참으며 버티는 것뿐이다. 이중 「음악의 가격」은 소설가와 인디 뮤지션의 이야기로 현대 경제학은 노동가치설을 부인하기에 이들과 같은 예술 업계는 그저 '버티기'밖에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음악의 가격」은 인디 뮤지션이 공연하던 '크툴루'라는 홍대 클럽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크툴루 고별 공연장에서 지푸라기 개라는 인디 뮤지션이 음악노동자연대 가입신청서를 돌렸는데 누군가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물었고, 며칠 뒤 크툴루 사장이 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일화가 머릿속에 한 묶음으로 남아 있었다. (301-302면)

'크툴루'는 '버티기'와 '못버티기', 연대와 해체, 생존과 죽음이라는 이항 대립의 공간으로 존재하는데 이는 '버티기'를 못하면 남은 건 죽음뿐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공간에서 소설가는 '지푸라기 개'라는 인디 뮤지션을 만난다. 소설가가 이름의 뜻에 대해 묻자 '지푸라기 개'는 자신의 이름을 도덕경에서 따왔다고 말한다.

"원래는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죠. 거기에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는 구절이 있거든요. 그 말이 멋있어서 거기서 따왔어요. 지푸라기 개는 그만큼 하찮은 물건이라는 뜻이죠." (302면)

'지푸라기 개'는 하찮은 물건이라 말한다. 이는 단순히 말 그대로 자신의 하찮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의 하찮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의 가격'은 1원도 안 되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스트리밍 서비스로 한 곡을 들을 때 뮤지션이 가져가는 돈이 1원도 안 된다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한 곡을 재생하면 매출이 7원쯤 발생하는데 거기서 1.3원쯤 되는 돈을 작곡자, 작사자, 편곡자, 보컬, 연주자가 나눠 갖는다고 했다. 그 1.3원도 서비스 가입자가 아무 할인을 받지 않고 정가로 서비스 요금을 낼 때 얘기였다. (304-305면)

재화와 용역의 가치는 투입한 노동이 아니라 구매자의 주관적인 효용과 공급량, 보완제와 대체재의 가격 같은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에 스트리밍으로 노래 한 곡 들으면 1원을 받고, 소설가가 열흘 동안 쓰는 원고가 두 시간 남짓 떠드는 강연보다 가격이 낮게 책정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합리적인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예술가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삼성이 음악 스트리밍 사업에 진출했을 때 '음악노동자연대'에서 저항의 의미로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릴레이 버스킹을 했을 때도 바뀌는 건 없었다. 오히려 '지푸라기 개'는 평상시엔 하지 않았던, 직설적인 가사의 노래를 부르다 허탈해질 뿐이었다.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성평등운동, 소수자운동, 환경운동, 동물권운동, 그런 기획들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거대한 질서가 새로 생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변화를 잘 타고 미끄러지는 것 정도이지 않을까? (323면)

자본주의 질서는 개인을 통제한다. 사람들의 관계 아래에는 깊은 질서가 있어 그 질서에 따라서 사람들은 행동한다. 유별난 예술인들은 그저 도덕경의 말대로 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 혼자 고루하고 촌스럽네.

나만 홀로 사람들과 다르니, 그저 먹고사는 데 힘쓰리라. (314면)

예술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경제적으로 쓸모가 없으니 먹고사는 데 더욱 힘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불만을 토로하면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길은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네가 원해서 하는 거 아니냐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편의점 나가서 일하면 최저임금은 받을 수 있다고. 반박하기가 어렵다라고요. (310면)

먹고살기 위해 소설가는 강연업자가 되었고 지푸라기 개는 교육업 종사자가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버티며 살아남을 뿐이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시스템이 새로운 세상이 와서 다시 바뀌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재화와 용역에 무제한 스트리밍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다시 세울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할 테니까. 공급량, 보완재, 대체제를 넘어서. 그러면 좋은 음악은, 다시 소중해질지도 몰라. (335면)

이들은 자본주의적 가치가 무너질 때까지 버티며 살아남으려고 한다. 버티지 못하면 '크툴루 사장'처럼 그저 죽을 뿐이다.

살아남을 수 없는 '살아남기'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아이들은 만화책의 내용대로 현실에서 정수기를 만들고 덫을 설치했지만 물은 여전히 흙탕물이었고 덫에 걸리는 동물은 없었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에서 나왔던 생존 방식이 실제로 생존하는데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통하여 자본주의의 모순 그리고 갈등 아래 놓인 생존자의 이야기를 보고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문제점을 안다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게 맞을까. 소설을 통해 드러난 자본주의의 문제는 어쩌면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체감하고 있는 문제이지 않나. 그러니까 소설을 보기 전에 이미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체험했을 문제가 아닐까.

더욱이 「음악의 가격」을 보면 작가는 시스템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무위의 오묘함을 이야기하며 체념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작가 스스로도 자본주의에 우리는 저항할 수 없으며 그저 시스템에 따라 미끄러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를 통해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이,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를 보고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일까. 이때 여기서 하나의 단어를 바꾸면 하나의 가능성이 생긴다. '살아남기'에서 '살아가기'로 바뀔 때, 생존에서 삶으로 바뀐다. 즉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가 아닌 우리의 삶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로 전환된다. 이를 위해 「음악의 가격」으로 다시 돌아가자. 이러한 관점에서 소설을 다시 본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살아남기'에서 '살아가기'로

'나'는 쓰고 있는 연작소설에 단편 열 편을 실으려고 한다. 사실 경제학적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열 편을 실을 필요는 없다. 일곱 편도 충분하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주체, 이콘이라고 가정한다. 경제학 밖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판한다. 진실은 언제나 꼬여 있다. 인간은 이콘이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아닌 것도 아니다. 소설을 쓸 때마다 내 안의 이콘이 그렇게 공들일 필요있느냐며 딴죽을 걸었다. 강연 한 회 수입이 단편소설 고료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311면)

'나'의 이콘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시간을 강연과 방송으로 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콘의 말에 장기 투자 개념으로 쓰는 것이라며 핑계를 댄다.

그냥 쓰고 싶어서 쓴다고 해. 이콘이 코웃음을 친다. (312면)

이렇게 이콘에게 변명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으로부터 자본주의에게 빼앗긴 삶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가능성은 소설 속 재희를 통해 다시금 제시된다.

다문화가정, 결손가정 청소년에게 노래나 악기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에서 지푸라기 개는 재희를 만나게 된다. 기타에 별 관심 없던 재희는 지푸라기 개의 연주에 반하게 되고 곧 기타에 빠지게 된다. 재희는 센스가 좋았고 무섭게 기타를 배운다. 날뛰는 망아지 같던 아이는 점점 기품이 깃든다. 그러던 어느 날 재희는 자작곡을 들고 와서 부른다. 지푸라기 개는 재희가 가사를 잘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좋아하지 않는다. 자본주의화된 예술의 폐허 속으로 재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으론 돈 못 벌어, 인마. 결혼도 못해."

"상관없어요. 다른 거 해도 어차피 못 벌어요." (334면)

그러나 재희는 계급의 아래층에 있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돈을 벌 수 없다는 계급 구조의 부조리를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에 끌려다니며 생존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음악을 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즉 살아남고자 하는 것이 아닌 살아가고자 한다.

경제체제에 불과했던 자본주의는 어느새 사회체제를 넘어 우리의 삶의 체제가 되었다. 우리를 시장에 내몰며 생존하기만을 강요하면서 삶을 빼앗아갔다. 이제는 삶을 되찾아올 때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문학은 그것의 존재가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산 자들』은 자본주의에서의 생존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갇힌 거짓된 삶임을 「음악의 가격」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산 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로 읽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에서 살아가기'로 읽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자본주의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평론 부문 심사평

  이번 다형문학상 평론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모두 5편이었다. 예년보다 많은 응모 편수는 최근 뜨거워져 가는 숭실대의 문학열을 증명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편수도 편수지만, 응모자들의 수준이 높은 것에 심사자는 크게 고무되었음을 고백한다. 시에 대한 평론이 한 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소설에 대한 평론이었다. 모든 응모작이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날카로운 감식안으로 심사자를 긴장되게 하였다. 「「일러두기」를 통해 배워가는, 인공지능 사회에서의 살아가는 법」은 너무나 짧은 분량으로 인해, 기본적인 작의나 문학적 소양을 확인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반딧불의 묘』는 정말로 전범국인 일본을 전시의 피해자로 옹호하는 작품일까?」는 문제의식 하나만은 분명하게 전달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문학작품이 무언가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뜨거운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하나의 행성을 호명하는 방법-김희준의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을 읽어내는 길잡이」, 「차원을 잇(잊)기」,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장강명의 『산 자들』 읽기」였다. 이 중에서 「하나의 행성을 호명하는 방법」은 탄탄한 기본기와 안정된 문장이 돋보였다. 다만 김희준이라는 시인의 문학적 의의를 정립하기에는 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다음으로 「차원을 잇(잊)기」는 글 전반에 흐르는 위트와 재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푸코의 담론 이론도 가져와 활용하는 부분에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좀 더 문장의 정확도를 높이고, 논의의 정밀도를 높이기를 기대해본다. 오랜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장강명의 『산 자들』 읽기」였다.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 ‘살아남기’, ‘살아가기’라는 다섯 개의 동사를 통해, 장강명의 작품을 요령 있게 요리해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시대의 긴급한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해보겠다는 의식이 대학문학상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선자에게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나머지 응모자들에게도 문운이 따르기를 빈다.

김인섭 교수(문예창작전공)

이경재 교수(국어국문학과)


평론 부문 수상소감

  우선 평론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주셨던 김미정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문학에 더욱 빠지게 되었으며, 평론이 저의 길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주셨던 박준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비평은 합주다'라고 하셨던 말은 늘 되새기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서관 계간지 구독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문학동네, 창작과 비평과 같은 중요 문학 계간지를 구독하고 있었으나, 올해부터 예산 부족으로 인하여 중단되었습니다. 문학을 공부하고 창작하는 학우를 위하여 부디 구독을 재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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