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문학(소설)이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구혁명 안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 (주관성)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언명은 근대의 가장 유력한 소 설관으로서 소설은 한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윤리적이며 지적인 난제를 온몸으로 짊 어지는 수난자가 됨으로써 오히려 사회의 영향력과 존재의의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러한 근대 소설의 모습에 가장 부합하는 한국의 최근 소설가로 김강만한 이는 드뭅니다. 그의 소설은 늘 공동체의 올바른 존재 양태에 대한 탐색과 그것을 가로막는 힘에 대한 비판 정신으로 가득 했으니까요. 그리하여 그가 노벨을 벗어나 SF나 알레고리로 훌쩍 뛰어넘는 순간에도 역시나 그의 관심은 늘 이 시대와 공동체를 향해 있었습니다.

  그랬던 김강이기에 얼마 전에 발표한 「아담」(『착하다는 말 내게 하지 마』, 작가, 2024)은 매우 독특한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아담」은 기인이라 할 수 있는 ‘그’에 관한 일종의 보고서인데요. 소설가인 ‘나’는 초등학교 뒷산에 살고 있는 “자연 인”인 그를 찾아갑니다. 그는 소나무 껍질로 된 가면을 쓰며 자신을 감춘 채 살아가 고 있습니다.

  그는 친구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오다가 넘어진 후에 자신의 왼손바닥에 “세 번째 눈”이 생겨난 것을 발견합니다. ‘세 번째 눈’을 통해 그는 “상대방 모르게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게 되는데요. 이때 그가 ‘세 번째 눈’으로 주로 보는 것은 “표범 무늬 팬티”처럼 음란한 것들이네요. 그러다가 그는 “직장에서 버스에서 카페”에서 ‘세 번째 눈’을 통해 상대를 간음하는 “발갛게 달아오른 두 흰자위와 초점 없이 확장된 동 공, 반쯤 벌린 입술과 입술 사이로 날름거리는 혀, 앙상하게 드러난 광대”의 자기 “얼 굴을 봐버”리게 됩니다.

  그날 이후 그는 왼손바닥에 밴드를 붙이고, 이후에는 왼손바닥을 송곳으로 찔러도 보고 칼로 헤집어 보기도 합니다. 나중에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마주할 자신마저 사 라져, 결국 산으로 가서 혼자 삽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김강 스타일의 서사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가 노트에 남긴 “하긴 세 번째 눈은 잘못이 없어. 그것이 오기 전 에도 그는 그랬었잖아. 그랬고말고. 그 눈동자 그 혓바닥, 그가 가진 모든 감각으로 탐했지. 상상으로 머릿속으로.”라는 문장이 나 “그는 운이 좋은 놈이기는 하지. 왼손바 닥에 있는 그것이 없던 시절에는 달랐을 것 같아? 그저 들키지 않았을 뿐이지. 하지 못 했을 뿐이지. 그게 운이 좋은 거지.”라는 말에 비춰본다면 인간이 지닌 비루한 욕망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 정신이 가득한 서사로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 세상의 많은 문제와 오점에 예민한 소설가 김강이 조형해 낸 ‘최초의 인간’답게 자신 안에 있는 그릇된 욕망과 감각들을 예사로이 보지 못하는 강박적으로 염결한 인간의 원형 인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어지는 아담의 과도함에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 인’이 된 것도 모자라서 “손바닥의 눈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얼굴이라도 가려야” 한 다는 마음으로 소나무 껍질 가면을 만들어 씁니다. 이후에는 자신의 성기를 자르고,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세 번째 눈’이 있는 자신의 왼 손목까지 잘라 버리는데요. 그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그 모든 것을 잘라 개에게 주어 버린 이후에도 “손모가 지도 잘라내었는데 자꾸 떠오르면 다음엔? 그다음엔? 하긴 기억이 사라질 수 있겠어? 이 머릿속 어딘가 영원할 테지…….”라고 번 민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그의 부끄러 움과 염결함은 그 과도함으로 인하여 긍정 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풍자의 대상 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소설가인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죽으면 “한 문장으로 신문에 부고를 내어 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했는데요. 그 문장은 바로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다 고. 부끄러워서 그랬다고.”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나’는 그가 겪은 일이 “직장을 그만두고 이혼을 하고 집을 나와야 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인가라며 의문을 표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신문사에 가서 그의 부탁대로 부고를 전하기로 합니다. 부고의 문장은 “그는 부끄러움이 많았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나‘의 태도 속에는 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들뢰즈가 주장한 메저키스트적 저항이 떠오르는데요. 들뢰즈는 매저키스트가 느끼는 자기 처벌 욕망은 자기 안에 대타자를 들여놓았기 때문에 즉 대 타자와 닮아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기에 매저키스트는 처벌받고자 하는 동시에, 보다 본질적으로는 대타자를 처벌하고자 하는 욕망에 들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매저키스트는 자신을 과도하게 처벌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기 안의 대타자를 처벌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아담」에 등장하는 그는 자신의 성기와 손목까지 잘라가면서 과연 무엇을 처벌하고자 했던 걸까요? 아담의 과도함 속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종의 과도함에 대한 비판의식이 녹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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