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어 가는 시기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만나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 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 어려운 일들을 해내 곤 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모두가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 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비슷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 은 없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뉴스를 켜면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을 들을 생각도 없는 것처럼 싸우고 소리 지르며 자신의 기준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물어뜯고 혐오하는 듯합니다. 지금 사회는 대혐오의 시대라고 할 만큼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깎아내리기만 합니다. 공인이 어떤 잘못을 하기만 하면 용서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혐오를 즐기는 것처럼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비난을 버티지 못한 공인이 손해를 보거나 심지어 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그 비난은 멈춥니다. 아니, 멈추지 않고 다른 비난과 혐오의 대상을 찾아다닙니다.

  비단 이념 혹은 공인에 대한 혐오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서로에게도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곤 합니다. 서로 관계가 안 좋아진다면 그 관계를 회복할 생각이 아닌 관계를 끊어낼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서는 관계가 끊어진 상대를 혐오하고 비난하며 심지어는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깎아내립니다. 팩트는 뒷전이 되고 상대를 비 난하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더 큰 관계의 악화를 가져오고 혐오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가 어째서 이렇게 변했을까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기주의가 사회에 과도하게 만연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사회구조에서 개인주의적 사고는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를 오염시킨다면 우 리는 그것을 이기주의라고 부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위에서 말했던 ‘너’와 ‘나’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너’에게는 어떤 것도 소비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해이든 용서이든 동정이든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노력은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왜 용서해야 할까요. 사실 그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남을 용서했을 때 직접적으로 돌아오는 영향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은 성장을 추구하는 동물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진 사람이기를 원합니 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 번쯤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나를 위한 그 작은 노력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밝게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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