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이수처럼 다양한 공간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는 작가도 드물 겁니다. 호주를 배경으로 한 등단작 「캥거루가 있는 사막」(2000)에서 부터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최근 작 『탑의 시간』(2020)에 이르기까지, 해이수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곳이 아닌 저 먼 곳을 배경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요. 수평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몽골의 모래바 람과 수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히말라야의 눈보라까지 헤매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를 찾아 헤 매온 소설가가 바로 해이수인 것 입니다.
그런 그가 「구보의 아들」(『문학인』, 2025년 봄호)에서는 저 먼 히말라야의 빙벽에까지 주인공을 올려 놓았네요. 소설 속 ‘나’는 서울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히말라야에 가서 시타난다라는 명상가를 찾아 갑니다. 동굴에 사는 시타난다는 “한 종지 분량의 식은 커리와 납작한 빵 한 장”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소문 난 현자인데요. ‘나’는 도대체 무슨 고민이 있기에, 서울을 떠나 히말라야의 그 춥고 배고픈 빙벽에까지 오른 것일까요? 히말라야에서의 첫날밤에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떠올린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 를 내몬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요, ‘나’는 그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혹한의 빙벽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요양원으로 갈 때면, “사라져 주세요! 나의 현재를 위해서, 그리고 나의 미래를 위해서 제발!”이라는 “오래된 기도”를 올릴 정도로, 아 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요. 요양원에 가서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후에는, 늘 “아버지 사라져주세요. 우리의 환한 내일을 위해서!”라고 기도를 올리곤 하네요. 이것은 비단 지난 3년 동안 혼자서 요양원 비용을 대고 정기적으로 아버지를 챙겨오는 것에서 비롯된 고단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는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 입시학원에서 돈을 벌며 청춘의 시간을 다 보내다 시피 했으니까요. ‘내’가 이토록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아버지의 극단적인 정치적 성향 때 문입니다.
“초지일관 이해불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는 시간이 갈수록, ‘나’ 에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데요. 심지어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를 인사차 데려갔을 때도, 아버지는 극단적인 정치적 의견을 일방적으로 퍼부어 여자친구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떠나고자, 더 근본적으로는 그런 아버지가 살아가는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떠나고자 ‘나’는 히말라야에 오르게 된 겁니다. 그러고 보면, 해 이수의 「구보의 아들」은 적대와 분열이 거의 ‘내전’ 상태에 이른 지금 우리 시대의 분위기를 배면에 거느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처음 시타난다에게 폼나는 명상법, 일테면 “거꾸로 서서 하는 명상” 같은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데요. 시타난다는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간단한 호흡법 같은 것만을 가르쳐줄 뿐입니다. ‘내’가 “적합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 달라고 할 때도, 시타난다는 “내 안의 고독이 하는 말을 들으면 되네.” 라고 담담하게 말할 뿐인데요. 별다 른 어려움 없이 진행될 것 같은 둘의 사제관계에, 시타난다가 명상의 마지막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부모님을 떠올리라고 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소한 일로 시타난다에게 꾸중까지 듣게 되면서, ‘나’는 히말라야를 떠나 하산하기로 결심하는데요. 시타난다의 물병까지 깨부수고, 시타난다가 사는 산중턱을 향해 감자밥까지 먹이며 신나게 내려가던 도중에, ‘나’ 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의 시타난다를 만나고 맙니다. 그런데 시타난다는 화를 내기는 커녕, 차분하게 “이제 괜찮다. 그가 편히 잠들었다. 그리고 저 언덕 너머로 넘어갔다.”고 말하며 ‘나’를 배웅해 주는군요. 그러고 보면, 시타난다는 처음부터 ‘나’를 제자로 가르치기보다는 지상으로 내려보내기 위해 애써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스승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얼음에 갇힌 검은 새 한 마리가 창공으로 날아 오르는 환영을 보는데요. 저는 이 ‘검은 새’가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아버지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평생 동안 아버지에 대한 미움 속에 갇혀 있던 ‘나’ 자신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타난다라는 현인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나’는 아버지를 미워한 것이 어리석었음을, 더욱 중요하게는 그런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곳이 이 지구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자신이 미숙했음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요?
해이수의 외국 배경 소설은 기본적으로 자아와 세계 사이의 근원적인 일체성의 상실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정리할 수 있는 낭만주의의 토포스에 충실합니다. 현실에의 절망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초월이라는 정념이 해이수의 소설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성(聖)스럽게 하는 낭만적 충동도 물론 소중한 것이지만, 「구보의 아들」에 담긴 지상을 향한 하강의 의지 역시 지금 우리 시대에는 무척이나 소중한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