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화와 함께 문학이 지녔던 영향력의 상당 부분은 다른 매체들, 일테면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른 매체가 따라올 수 없는 문학만의 강점도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는 거의 무한대의 자유로 심연과도 같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물의 내면 심리에 대한 묘사만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도 존재할 정도니까요.

  오늘 이야기하려는 권여선의 「헛꽃」(『문학동네』, 2024년 가을 호)은 환갑을 앞둔 혜영의 심리를 잔인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입니다. 언제부턴가 혜영은 하루 종일 커튼도 열지 않고 거의 외출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지내는데요. 이 고립된 어두움 속에서 혜영은 “나 혼자만 고통 속에 안전하게 유폐되어 있는 느낌”을 받고는 합니다. 혜영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헹맹 빠진 년”이라느니 “데퉁맞고 불효막심”하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며, 혜영은 “세상도 하찮고 나도 하찮고 나같이 하찮은 존재는 아무리 하찮은 대접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자기 모멸감을 내면화 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혜영은 이어지는 삶에서도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벗어 나지 못하는데요. 혜영은 우연히 만난 선배의 지인과 “결혼도 이혼도 하찮게 했”던 것입니다. 신혼여행 을 다녀온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남자가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 때도, 혜영은 그 상황이 도무지 낯설면서도 너무도 익숙한 데 놀랍니다. 자존감이 낮은 혜영은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상한 확신”을 느껴왔던 겁니다. 한집에서 살던 시절 그 남자는 혜영에게 “너는 말이야, 헛꽃이다. 헛꽃이야.”라는 말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요. 혜영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헛꽃(열매를 맺을 수 없는 꽃)’이라는 단어를 발견하면서 오래 잊고 있던 그 단어는 환갑을 앞둔 혜영에게 빚쟁이처럼 찾아옵니다.

  『전쟁과 평화』에서 선량하기 이를 데 없는 소냐는 니콜라이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치지만, 처절하게 배신당하는데요. 그것도 모자라 이후에도 니콜라이와 주변 사람 들을 도우며 헌신적으로 살아갑니 다. 그런 소냐를, 니콜라이의 아내 인 마리야와 니콜라이의 동생인 나타샤는 뻔뻔하게도 ‘헛꽃’에 비유했던 겁니다. 혜영은 소냐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진 걸 모두 양보하고 빼앗기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 살게 된 사람”이자 “자신이 마모되고 파괴되고 침묵되는 것이 아무렇지가 않은 사람”이며, 그리하여 “내 면도 감정도 없으리라고, 모욕도 불안도 열렬한 분노와 증오도 없으리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는데요.

  당연히 이러한 ‘헛꽃’의 이미지는 소냐뿐만 아니라 혜영에게도 해당합니다. 혜영 역시 평생 가족을 돌보았으며, 잠깐 함께 산 남자에게는 이용만 당했으니까요. 환갑을 앞 둔 지금은 엄마의 온갖 병치레를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혜영은 엄마가 간호 간병이 다 되는 통합 병동에 입원했을 때도, 악착같이 간병을 맡아서 하는데요. 그로 인해 불면증, 방광염, 우울증, 이명 등에 시달리는 혜영을 보며, 동생인 혜진은 “위태로운 효도를 자학적이고 강박적으로 수행”한다며 비난할 정도입니다.

  인간 심리의 탐구에 있어서만은 권여선의 「헛꽃」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헌신과 봉사’의 상징으로만 그려지느라 『전쟁과 평화』에서는 드러난 바 없던 소냐의 ‘지옥 같은 마음’을 혜영에게 부여하는 겁니다. 혜영은 소냐의 내부에 “아무에게도 발견된 적 없는 스산한 지옥이 깃들어 있다”고 단언하는데요. 한국의 소냐인 혜영이 톨스토이도 포착하지 못한 “그 마음의 지옥”을 스스로 펼쳐 보이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엄마가 눈길에서 미끄러졌다는 연락을 받은 혜영은, 앞으로 엄마가 겪어야 할 기나긴 고통과 그동안 자신이 수행해야 할 가혹한 의무를 떠올리며, “자신을 헛꽃으로 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자 “자신이 헛꽃이 될까봐 걱정해준 유일한 사람” 인 혜진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는 “눈도 오는데 한잔할까?”라고 천진하게 말하는 혜진에게, “지금 우리가 그럴 때가 아니야.”라고 음산한 목소리로 대답하는데요. 이에 혜진은 “응? 언니야, 왜?”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혜진의 떨리는 목소리는 혜영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네요. 어린 시절 기대에 차서 웃는 혜진의 얼굴에 대고, 혜영은 수도 없이 “혜진아, 지금 우리가 그럴 때가 아니야.”라고 말해왔던 겁니다. 그때마다 혜진의 얼굴이 “불길한 실망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며, 혜영은 엄마나 할머니가 자신에게 행사했던 권력을 “자신이 어린 혜진에게 행사하는 데서 오는 이상한 희열을 맛보 곤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그려낸 소냐에게 없던, ‘마음의 지옥’은 스스로가 피해 자가 됨으로써 왜곡된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으로 볼 수 있겠죠. 혜영은 자신에게 폭언을 하고 폭행을 했던 할머니나 어머니와는 정반대 에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런 혜영은 가련한 모습으로만 그려진 소냐의 모습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혜영이 펼쳐 보인 “그 마음의 지옥” 속에는 스스로 ‘쏘냐’가 됨으로써, 동생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고 지배하려는 음험한 욕망이 꿈틀 거리고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됨으로써 지배자가 되려는 인간 심리의 기묘한 아이러니야말로, 어쩌면 톨스토이도 가보지 못한 인간 심리의 심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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