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꽃들의 숨겨진 운명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인다고, 내가 좋아하는 책의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벚꽃이 어떤 환호를 받으며 비처럼 낙하할지, 목련이 어떤 색으로 바뀌어 종내엔 우리 발끝에 채이게 될지.
그러나 꽃들의 유한한 운명과는 무관하다는 듯, 이맘때쯤의 따스한 지구의 공기는 봄 마다 우리가 낙관적 미래를 도모하게끔 한다. 그 꽃들 곁의 사람들이 해마다 반복되는 이 권태로운 봄에도 여전히 ‘새로운 시작’, ‘출발’, ‘도전’, ‘설렘’ 같은 이름을 붙이게끔 한다.
지구가 매해 봄마다 따스한 공기를 타고 우릴 따스한 단어 품으로 내몰듯, 우리도 그 나름의 노력에 응해 저 꽃들과는 다른 우리만의 생을 알아야 한다. 숨겨진 운명도, 정해진 결말도 없는 인간의 생을 말이다.
우리는 정해진 때에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다르다. 우리는 나 자신의 운명을 오롯이 쥐 고 있는 단 한 사람이다. 그 단순한 사실이 무거워 우리는 자주 무너진다. 하고 싶지 않 아도 해야만 사는 일,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 믿는 일. 매일같이 우리의 더 나은 운명을 위해 살아가다, 어느 순간 슬픈 낯을 보이고 마는 우리가 있다.
문득 생각한다.
봄철 꽃들이 우리 살갗에 나풀나풀 끝없이 내려앉는 것을 바라본다. 저 꽃잎이 고작 우리들의 슬픈 낯을 보기 위해서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맥이 빠진다. 슬픈 낯보다 기운찬 우리들의 낯을 좋아할 듯해 그 앞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서있다. 그러니 3월의 꽃 말은 “나 지금 별별 의미를 찾느라 소중한 이 지금을 다 놓치며 사는 바보 같은 인간들을 눈 흘기며 떨어지고 있어요” 즈음이 되려나.
인간의 삶은 반복이 아니다. 되돌아가는 길도 없다. 그저 단 한 번뿐인 길을 어떤 날엔 퉁퉁 부은 눈으로, 어떤 날엔 명랑한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일. 그러다 잠시 멈추어 더운 기 운에 피고 서린 기운에 지는 그 지고지순한 꽃잎 앞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생의 자유로움 아래서 빗겨난 미래와 깨어진 약속들을 붙들고 울고 있는 우리의 삶이. 수없이 망설이다 못해 자꾸 넘어져 자주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삶이. 사실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었음을 본다.
나는 특별히 모난 것 없이 자라 이 학교에 와, 어느 가을날엔 자전거를 타기 위해 수업을 빼먹고 어느 겨울날엔 좋아하는 시인의 강연을 듣기 위해 과 행사를 마다하는. 기대한 것 보단 조금 불량한, 그러나 확실한 내가 되었다.
예상 경로를 언제든 벗어날 수 있기에 아름다운 삶이다. 우리에겐 꽃잎처럼 이 봄, 다 해야 할 소임 따위는 없다.
그러니 꽃잎보다 자유로운 자기 앞의 생을 기뻐하길 바란다. 언젠가는 본인에게 가장 충만한 봄을 찾아 떠나길 바란다. 가끔은 현실은 다 제쳐둔 채 가장 엉뚱하고 무책임 한 자신과 기꺼이 마주하길 바란다.
그리곤, 그저 어떤 날엔 슬픈 얼굴빛만을 알던 꽃잎을 찾아가 처음으로 사람의 말간 얼굴빛으로 웃어보이는 날이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