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 流行中國碑)가 서안의 숭인사(崇仁寺)에서 발견됐는데, 이 비문을 주목해 기독교의 중국 전래를 언급한 학자는 바로 명대의 걸출한 과학자이자 중국 기독교의 초석을 다진 내각대학사 서광계였다. 1627년 산서성 지앙쩌우에 천주교회를 건축할 때 서광계는 〈경교당비기(景敎堂碑記)〉를 찬술했는데, 경교유행비에 의거하면, 기독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된 사적은 당태종 정관 9년 (635)에 네스토리우스파 대주교 알로펜이 수도 장안에 입성해 기독교의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기술했다. 635년 당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파견해 알로펜 일행을 영접해 황궁에서 강론을 들은 후 서전을 설치해 경전을 번역케 했고 장안에 대진사(大秦寺)를 건축해 경교를 우대했다. “大秦”은 동로마제국을 지칭하는데, 알로펜 주교는 천주교에서 이단으로 간주한 네스토리우스파의 콘스탄틴교구 대주교로 시리아 사람이다. 그는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 추방된 뒤, 추종자들과 함께 중국에 들어와서 선교사업을 진행했다. 서광계는 중국의 기독교는 마테오 리치가 1580년 중국 광동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보다 천년이 넘는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산서 지앙쩌우 천주교회당을 “景敎堂”이라 불렀고 자신들을 경교의 후예라고 지칭했다.
경교유행중국비는 대주교 경정(景淨)이 당나라 건중 2년(781)에 비문을 찬술했고 서예가 여수암이 漢文 전체를 정서체인 해서체로 썼고 비문 중 네 곳의 문장은 고대시리아어로 기록됐다. 경교가 금교를 당한 것은 당나라 무종 회창 5년(845)으로 알로펜 주교가 장안에 입성한 지 210년 뒤다. 금교를 당한 뒤 사찰과 재산은 몰수됐고 이후 경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경정은 30권의 경전을 번역해 황제에게 상정했는데, 현존하는 경교 경전은 모두 6종만이 남아 있다. 이들 경전은 1900년 초 돈황의 명사동굴과 모가오석굴에서 발견됐고 프랑스 국가도서관과 일본 교우쇼오쿠杏雨書屋에 소장돼 있다. 그중 6종의 원본《序聽迷詩所經(서청미시소경)》, 《一神論 (일신론)》, 《志玄安樂經(지현안락경)》, 《大秦景敎宣元本經(대진경교선원본경)》, 《大 秦景敎三威蒙度讚(대진경교삼위몽도찬)》, 《尊經(존경)》)이 현존한다. 5종의 경전은 기독교의 주요 교리와 경문을 번역한 것이며 《대진경교삼위몽도찬》은 한문으로 기술된 최초의 찬송가인데, 이들은 권축형 두루마리 형태의 해서체 필사본이다.
1900년 도사 왕원록에 의해 처음 발견된 돈황유서는 90% 이상이 불교전적인데, 이 중에 경교의 경전은 기독교의 한국선교사 연구에 있어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금강산 장안사의 탁본 《대진경교유행비문》이나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경교돌십자가”와 경주 출토“마리아상”과의 연관성 연구는 통일신라시대 한반도에 이미 기독교가 전파됐다고 확신하는 영국의 고고학자 고든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고대 중국의 3대 발명품 종이는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 전래돼 지질 두루마리 필사본의 소재가 됐는데, 기원전 2세기의 “대이 사야서 두루마리”가 바로 돈황의 필사본 경교문서와 유사한 장정형태를 가지고 있다. 중세에 중국 하남성 개봉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카이펑 에스더 두루마리”도 서역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전래된 필사본 문서다. 이런 필사방식은 동서양의 서적출판 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돈황의 4세기경 사본들부터 서양의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출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채택됐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10종의 실크로드 필사본이 전시돼 유럽에서 중동, 중앙아시아, 돈황, 일본에 이르는 각종 필사본의 다양한 출판형태를 볼 수 있었다.
1517년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95개 논제〉를 발표해 종교개혁을 시작했고 이 논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인쇄돼 불과 2주만에 독일전역에, 2개월만에 유럽 전역에 전파됐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카톨릭교회의 개혁을 촉구해 개신교가 탄생하게 됐고 문예부흥운동을 일으켜 인 본주의 사조를 형성했다. 마틴 루터는 라틴 어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독일어성경을 출판해 일반 민중이 자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1882년 중국 심양에서 영국 선교사 존 로스 목사는 한국인 개종자 이응찬, 백홍준 등의 협력을 받아 한글역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했고 1887년에는 신약전서 《예수성교전서》를 서울에서 출판했다. 이러한 순한글 성서번역은 일반 백성들이 한글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게 해 한국 민중의 복음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실크로드의 문물교류와는 정반대로 서역에서 동양으로 전해지는 종교의 동양전파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비문, 석물, 토기 등을 포함한 금석문과 경전사본의 경교 유물들은 당나라, 통일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중국, 한반도에 이미 전래됐음을 보여줬다. 고대부터 문화의 발전과정 속에 선별된 148점의 성경 유물을 숭실 개교 127주년 기념전시회에서 볼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숭실의 건학이념을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 개혁정신을 통해 살펴 보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기독교박물관의 문화유산은 고고학, 역사지리학, 언어문자학, 문헌서지학, 고증학, 번역학, 해석학 등의 토대연구 위에 통시적이면서도 글로벌화한 학제간 융합관점으로 동서양의 크로스 실크로드 연구와 연계해 숭실기독교유물의 독보적인 문화유산의 가치를 발양해 나가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