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토) 본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주최하는 제35회 박물관문화아카데미 프로그램에 참여해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시대를 아우르는 역사의 장 강화도를 다녀왔다. 수천 년 한반도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자,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고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인 강화의 숨결을 느껴 봤다.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
본교에서 출발해 두 시간을 달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용흥궁 공원이었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철종의 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대원군으로, 철종의 집안은 조부 대부터 강화도 유배생활을 해 왔다. 헌종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순조의 5촌 조카인 철종을 순조의 양자로 입적 시켜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게 된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강화도에 유배되기 시작했다. 이후에 도 가문이 여러 역모에 연루돼 계속 유배생활을 하며 평범한 농민으로 살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왕의 승하로 한순간에 농사꾼에서 왕이 되며, 철종은 역사에 남은 진 귀한 삶을 산 인물로 꼽힌다. 이처럼 강화도는 유배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한반도 역사 속 여러 인물이 유배당한 곳이다. △고려 희종 △조선 연산군 △광해군 등이 강화도에 유배됐다.
철종의 즉위 이후 기존에 철종이 살던 초가집을 허물 고 기와집을 새로 지었다. 이후 ‘용이 흥하게 됐다’는 의 미의 용흥궁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용흥궁의 현판 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며 집 안에는 철종이 거주하던 옛 거처임을 확인할 수 있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용흥 궁은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와 우물이 있다. 용흥궁은 실 제 궁보다는 살림집처럼 지어져 다소 소박하고 순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동서양의 융합,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공원 바로 옆에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자리 하고 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으로 1900년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고요한(고프르, Gorfe.C.J.) 주교에 의해 건립됐다. 강화성당은 현재도 예배 장소로 사용된다. 강화성당은 서유럽의 바실리카 양식과 동양의 불교 사찰 양식을 조합한 독특한 건물형태를 띈다. 건물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을 따라 축조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한식 목구조와 불교사찰 형태를 따랐다.
용흥궁을 나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외삼문이 나온다. 외삼문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 △성당 △사제 관 등을 볼 수 있다. 내삼문을 지나 성당 옆에는 초대 사 제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탁 트인 강화의 풍 경이 한눈에 보인다. 용흥궁부터 고려궁지까지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최후의 피난처, 고려궁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나와 강화초등학교 방향으로 쭉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고려궁지에 다다르게 된다. 고려궁지는 고려가 대몽항쟁기인 1232년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천도한 후 궁궐을 건립한 터다. 고려가 몽골과 화친해 환도하는 1270년까지 39년간 사용하던 궁궐이나 환도하며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는 왕의 행차 시 머무는 행궁 외에도 유수부 동헌, 외규장각 등을 건립했으나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됐다고 알려진다. 현재 고려궁지는 실제 고려 궁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명위헌, 이방청 등 조선시대 관아건물 몇 채와 복원된 외규 장각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최우가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개경의 궁궐보다는 규모가 작았으나 수도다운 위엄을 갖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건립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궁궐 뒷산의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명명했다.
외규장각은 정조가 의궤 등의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 할 목적으로 설치한 규장각이다. 의궤에는 국가에서 행해진 의식과 행사의 진행 과정 전부가 상세히 기록돼 있어 소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지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퇴각하며 외규장각을 불태웠고 일부 의궤는 약탈해 본토로 가져갔다.
수천년의 역사, 강화 부근리 지석묘
강화는 우리 역사 속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고대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 중 선사시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강화의 유적으로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전북 고창군과 화순군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불리며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300년 사이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전 세계 고인돌의 약 40%가 한반도에 위치 하며 한국에만 3만여 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기존에는 고인돌을 출토된 지역에 따라 남방식, 북방식으로 구분해 왔으나, 현재는 구조와 형식에 따라 탁자식 고인돌, 바둑판식 고인돌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강화도에는 160여 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그 중 하점면 부근리에는 낮은 구릉과 평지에 최대 4기씩 무리를 이룬 40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탁자식 고인돌로 △전체 높이 2.6m △덮개돌 길이: 6.5m △두께: 1.2m로 총 무게가 50톤이 넘는다.
고인돌은 축조 방식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크기도 매우 크고 무게도 수십 톤에 달하기에 이를 옮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의 경우 대략 500여 명의 인원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됐으며 이들을 동원하고 식사까지 책임질 수 있는 상당한 경제력·정치적 권력을 가진 지배 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인돌은 그 크기와 무게에 따라 무덤 주인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강화역사박물관&자연사박물관
강화 부근리 지석묘 바로 옆에는 강화역사박물관과 강화자연사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강화인 만큼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강화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강화자연사박물관 1층 로비에는 향유고래의 뼈를 관람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09년 강화군에서 발견된 것으로 길이 14.5m, 무게 20톤에 달한다. 이 밖에도 생물 박제, 광물 등이 전시돼 있다.
호국의 섬 강화도, 광성보
강화는 대몽항쟁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외세와 최전선에서 싸운 호국의 섬으로 불린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모두 강화도에서 일어난 국제전이며 아직까지도 북한과 마주하는 서해의 최전방이자 군사적 요충지다. 지리상으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조선과 대한민국의 수도인 한성과 가까우며 △ 임진강 △한강 △예성강의 하류를 막는 중요한 요충지기에 예로부터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난 호국의 보고다.
강화도는 특히 동쪽에 강화해협을 끼고 있는데 강화 해협은 폭이 좁고 물살이 매우 거칠고 세 해상으로 침입 하는 적을 막는 역할을 해 왔다.
광성보는 특히나 그 치열한 전투를 보여 주는 현장으로 꼽힌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미군과 싸우다 결국 일부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한,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손꼽힌다. 어재 연 장군과 500여 명의 조선군이 주둔해 있었는데 미군이 초지진, 덕진진을 차례로 함락했고 손돌목돈대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압도적 기술력과 전술, 무기에 밀려 어 장군을 포함한 대부분이 사망하는 대패를 겪었다. 맥키 대위를 포함해 12명의 사상자만을 기록한 미국에 비하면 매우 열세했음을 알 수 있다. 열세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광성보 내에는 여러 비석이 있다. 광성보에는 신미양요 당시 사용한 포대와 성곽이 비교적 잘 보존돼 호국열사들의 치열한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