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온전한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에 의하면, 사람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본래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대세에 따름으로써, 인간은 안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인데요. 대세를 거스르는 일의 어려움은 하이데거 스스로가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 바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까지 일컬어지던 하이데거는, 당시 독일의 대세였던 히틀러에 협력함으로 써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성해나의 「길티 클럽:호랑이 만지기」(『혼모노』, 창비, 2025)는 대세에 따르는 인간의 연약한 심리와 그 이면에 놓인 악마적 쾌감까지를 침착하게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제목에 있는 ‘길티 클럽’은 ‘길티 플레저 클럽’의 줄임말로서, 죄의식을 뜻하는 ‘guilty’와 즐거움을 의미하는 ‘pleasure’의 합성어인데요. 길티 클럽은 영화감독 김곤의 “골수팬 스물여섯 명”이 모인 채팅방 이름입니다. 주인공인 ‘나’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할 정도로 실력도 있고, 센스와 교양이 넘치며, 섬세한 정치 감각까지 갖춘 김곤 감독을 진심으로 추앙합니다.
  ‘길티 클럽’의 여섯 가지 규칙 중에는 “일부 단어(ex. 파주 세트, A 군) 절대 사용 금지”라는 특이한 항목이 있는데요. 이 항목은 김곤 감독이 얽힌 추문, 즉 그가 촬영현장에서 눈물 연기를 못한다고 아역 배우의 팔뚝을 피멍들 때까지 꼬집었다는 의혹과 관련해 만들어진 것 입니다. 이 의혹으로 인해 김곤의 많은 팬들은 “빠에서 까”가 되었으며, ‘나’의 남자친구인 길우마저 “자긴 그런 인간을 소비하고 싶어?”라며 면박을 줍니다. 그러나 길티 클럽은 김곤 감독에 대한 “모욕과 혐오가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든든한 바운더리”며, 이 곳에서는 김곤에 대한 환호와 열광만이 대세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나’는 본래 김곤의 추문을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곤을 비호하면서도 의문을 감출 수 없던 순간들”을 수시로 갖고는 했던 것 인데요. 그러나 ‘길티 클럽’의 대세에 따라 점점 김곤 감독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신과 추앙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한 변화는 김곤 감독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길티 클럽’의 정모에서 확연하게 나타나는데요. ‘내’가 점점 ‘길티 클럽’의 대세를 따라가는 모습은, 한 명의 인간이 집단의 동조압력에 따라 단독자에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정모에 모인 여덟 명의 회원 중에 ‘나’와 미지를 제외한 회원들은 모두 영화과 졸업생이거나 휴학생 혹은 프리랜서 창작자와 같은 나름 전문가들입니다. 그들은 현학적인 지식과 교양을 뽐내느라 정신이 없는데요. ‘나’는 그들의 현란한 대화에 끼어들려고 노력하지만 무시만 당하고, 결국에는 “모멸을 넘어 굴욕감까지” 느낍니다. 이 순간 ‘나’는 자신이 얼마나 ‘길티 클럽’에 충성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요.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그 모임에 참석한 미지를 고압적인 태도로 찍어 누르는 것입니다. 사실 미지와 ‘나’는 그 모임에서 공통점이 많은 약자들입니다. ‘나’처럼 미지도 “무리에서 알게 모르게 겉돌고” 있었으며, 나이도 모임에서 늙은 축에 속하고, 둘만 지방에서 올라온 처지였던 겁니다. 그럼에도 김곤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그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미지를 향해,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믿어야죠. 우리는 그래야 되는 거 아녜요?”라고 일갈하는데요. 김곤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미지를 윽박지름으로써, ‘나’는 ‘길티 클럽’의 당당한 일원으로 남기를 원한 겁니다. 이때 ‘나’는 나중에 분명하 게 인식하게 될 악마적 쾌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잘못을 범함으로써 느끼는 쾌감, 즉 ‘죄 의식(guilty)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pieasure)’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길티 클럽:호랑이 만지기」는 대세를 따르는 모순된 쾌감이 얼마나 뿌리 깊은 인간의 속성인지를 드러 내며 끝나는데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신혼여행을 갑니다. 그곳의 동물원에서 발톱과 이빨이 다 뽑힌 채 “살기가 다 빠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침을 뚝뚝 흘리는 호랑이”를 만지며, ‘나’는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는 기분을 느끼는데요. 이 순간 “죄의식을 동반한 짜릿한 쾌감” 을 언젠가 이미 느껴본 적이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나’는 오래전 김곤 감독이 잘못을 범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세에 따르기 위해 미지를 윽박지르며 느꼈던 쾌감을 떠올린 것일 텐데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학대당하는 호랑이를 만지며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간의 의견이 아닌 본래의 자기와 마주하는 순간은 죽음과 대 면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대세에 따르는 데서 비롯되는 저릿한 쾌감에서 벗어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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