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와 상가가 수직으로 합쳐진 건물을 주상 복합 건물이라고 한다. 이 방식은 고밀도 도시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직으로 쌓아서 급속한 인구 증가를 수용하고 도시 생활을 3차원으로 조직하는 방식이다. 광화문 광장과 종묘 사이 지하철 종로3 가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돈화문로와 삼일대로가 교차하는 십자로 한복 판에 대표적인 주상 복합 건물, 낙원 삘딍1)이 있다. 60년대 후반 완공된 이 흥미로운 건물은 자동차가 거침 없이 달리는, 붐비는 도로 한가운데 서 있다. 사실 도로를 막은 것이 아니라 프란시스코 고야의 사투르누스처럼 자동차를 자신의 커다란 입 으로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인다.
낙원삘딍은 이렇게 대지가 아니라 도로를 따라 늘어선 커다란 콘크 리트 열주(列柱, Pilotis) 위에 전체 건물이 얹혀 있다. 어떻게 이런 건축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끝없는 성냥갑 아파트 속 내 집도 아주 조금이지만, 대지의 소유는 항상 표기되지 않던가? 하물며 붐비는 서울 도심에 상가와 주거 그리고 지하시장을 가진 대지(垈地) 없는 입체 건축이라니! 근대주의 건축의 오랜 염원인 대지 의 공적인 환원이 실현된 불가사의 한 낙원삘딍이 궁금하다!
산업화로 인한 도시 주거의 부족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안된 대규모 근대주의 주거 단지의 제안을 낳았다. 심각한 도시 문제였던 과밀화와 주거의 열악은 다양한 제안 중에서 지상층이 열린 공공 대지에 열주로 띄워진 고층 주거라는 혁신안을 보게 된다. “공원 위의 타워” 라는 유명한 근대 건축의 표어는 이런 상상에 기대어 있다.
아이디어 제안이나 부분적 사례로만 이어졌던 20세기 초 근대주의 주거는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 본격 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다. 낙원삘딍이 건설되던 60년대는 유럽과 일본의 급격한 건설 붐이 마무리되면 서 당시 획일화되던 주거 공급에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다. 세계 건축계는 타워형식의 근대주의 주거가 대지의 공공성과 공동의 삶에 대한 이상을 저버리고 다시 투기화 돼 가는 현실에 강력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윤 위주로 자본화된 주거의 공급과 이를 떠받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60년대 새로운 근대주의 건축 논 의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 중 하나가 콩스탕(Constant Nieuwenhuys)의 뉴 바빌론(New Babylon)이다. 네덜 란드 예술가이자 상황주의 인터내 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의 창 립 멤버인 콩스탕은 사유권으로 가득한 기존의 도시를 맹렬히 공격하 고 땅의 소유를 거부한 이상적 도시를 상상한다. 가상의 도시 뉴 바빌론 은 사회적 속박에서 해방된 건축, 예술, 기술 그리고 당대 공간 이론이 반영된 거대구조에 띄워진 약속된 낙원이다. 부동산 투기의 도구로 전락한 근대주의 건축을 비판하던 뉴 바빌론이 진정 도달하고 싶었던 이 새로운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상의 모습을 반전한 라퓨타의 땅, 뉴 바빌론은 투기적 욕망을 가로질러 공중의 인공대지(Artificial Land, 人工垈地)를 전제한다. 이 새로운 대지는 최신 건축 기술을 통해 올려지고 균질한 반복을 피한 피안(彼岸)의 땅이다. 이곳은 또 주체와 개성을 회복한 부유(浮遊)하는 신인류가 탄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떠있는 대지의 영감은 당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등 60년대 현대건축 운동을 만들어 갔던 수많은 젊은 건축가의 상상을 자극했다. 낙원상가가 이 중 어떤 사례에 영향을 받고 사회 적 가치를 공유했는지 알 길은 막막 하지만, 공공의 소유인 지상의 도로 위에 만들어진 입체적 공간과 상가를 대지로 품은 공동 주거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콩스탕이 오마쥬한 뉴 바빌론은 공중정원의 존재와 신이 다스리는 낙원의 이미지로 고대 문명에서 손 꼽히는 불가사의였다. 19세기 기계식 펌프와 압력 배관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까지 물을 중력에 거슬러 아름다운 수목이 자라는 높은 인공대지 요소에 공급하는 것은 고대 로선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력을 타고 물이 흐르듯 한 치의 빈틈 없이 꽉 짜인 현대 부동산 문명 은 콩스탕이 상상한 뉴 바빌론의 혁 명적 공간을 아예 불가능에 가까운 머나먼 일로 치부할지 모른다. 하지만 공중정원이 현대문명에선 식은 죽 먹기이듯 낙원삘딍의 “대지 없는 건축”도 당연한 일상의 흔한 풍경으 로 불현듯 나타날지 누가 알겠는가! 낙원삘딍을 지날 때마다 뉴 바빌론 이 꿈꿨던 낙원으로 향한 열망을 조 용히 되새겨 본다.
1 ) 낙원삘딍은 준공 시 건물 표식에 붙어있 는 이름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