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전 친구인 멜라니 후난 교수의 초대로 독일 드레스덴 대학 학기 말 설계 리뷰를 다녀온 적이 있다. 도시 설계 스튜디오였는데 체코 공화국의 한 도시를 중심으로 드레스덴 학생들이 산업화 시대 방치된 대규모 도시 시설을 재생하는 다양한 노력을 볼 수 있었다. 요즘 도시 프로젝트 리뷰에 가 보면 거의 단골처럼 녹지를 도입해 거대 유휴 시설을 다양하게 재생시킨 설계안을 볼 수 있다.
이런 도시 녹지화 프로젝트의 대표작으로 1999년 시작된 뉴욕의 하이라인(High Line)이 유명하다. 뉴욕 하이라인은 폐철도를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고가 산책로인데 도시 재생과 공공 공간 활용의 인상적인 사례다. 주목되는 점은 뉴욕시가 쓸모없는 구조물로 간주하고 철거하려는 계획을 당시 뉴욕 첼시에 거주하던 두 시민의 주도로 뒤바뀐, “건축”의 아래로부터의 디자인을 성취한 것이다. 이들이 결성한 시민 단체 “하이라인의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이 없었다면 고가 철도 위 인공 자연을 시민에 내 준 하이라인은 지금 철거돼 사라졌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서울로나 청계천을 비롯해 그 시효가 끝나 방치되거나 잊힌 도심 거대구조를 녹지 산책로나 인공화된 자연으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이 있다. 지금도 서울에는 많은 근대건축 유적이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거대구조를 꼽자면 단연 세운상가다.
연합군 폭격에 의한 화재 확산을 막으려 폭 50m, 길이 1km의 일제강점기 말 “소개공지”에 세워진, 건축이라 하기엔 너무 큰 세운상가는 정말 인상적이다. 60년대 말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세운상가는 시대의 기운이 젊었던 당대의 모습을 대변한다. 3층 높이의 공중 보행로가 기존 도로 위에 올려져 주거, 상업, 업무 기능으로 엮인 장장 1km에 가까운 입체적 건물이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건 축, 세운상가를 만든 건축가의 나이가 30대였으니 지금의 30대 건축가들과 비교하면 너무도 젊었던 당대 건축환경을 실감하게 된다.
세운상가처럼 비약적인 건축물의 출현은 기존에 물려받은 사회 조직과 구성이 급변하는 시기에 발현될 때가 많다. 하지만 격변의 시대가 발생시킨 이런 젊은 에너지는 그 규모가 암시하듯 당대 등장한 위정자의 절대적 권위, 기술 관료들의 야망과 이들의 총애를 받는 “건축가”의 합작물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멀게는 르네상스의 이탈리아가 그랬고 영국 프랑스의 산업혁명을 쫓아가던 독일이 비슷한 변혁의 경험을 했으며 가깝게는 세계대전 후 50년대 일본 건축가들이 급격한 사 회변화 속에서 전례 없는 건축 운동을 만들어 냈다. 혁명적이라 할 만큼 과감했던 세운상가는 이런 맥락에서 취업준비와 스펙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함의를 던지고 있을까? 단순히 젊은 건축가의 신화와 규모의 거대함에 갇힌 과거의 파격을 말하기보다 이 건축을 물려받을 다음 세대의 창조적 에너지와 상상력을 연계해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세운상가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를 허물고 지상 공원으로 개발하려는 안이 나와 있다. 주변의 개발을 촉진하는 이런 비워진 대형 녹지 공간은 상업적 측면에서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여느 서울의 도심개발처럼 여러 번 시도된 낡은 제 안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이미 섬으로 작동하는 도심 녹지의 불완전한 연장은 도시 기능을 동서로 단절하는 벽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 까지 사대문 안 서울 구도심을 걸어서 질주할 수 있게 만들어진 인공대지와 공중 보행로는 주변 조직을 새롭게 묶는 엄청난 잠재력의 공간이다. 도심 위 단절 없는 공중공원, 청계천과 수직으로 이어진 입체 녹지의 미래 세운상가는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이 설렘이 지난 겨울 방학 네덜란드와 스페인에서 젊은 건축가 다섯 팀과 함께 하는 세운상가 전시의 동기가 됐다. 기존의 콘크리트 구조를 인공대지 삼아 관객과 함께 만드는 “참여의 건축”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세상의 기운이 모이는 곳” 이란 세운(世運)의 작명처럼 우리 시대 건축의 운명은 20세기 낡은 건축에 새 기운을 접목할 이들 젊은 건축가의 에너지와 상상력에 달려 있다. 헌 옷을 수선하듯 낡은 건물을 고쳐 쓰는 지혜와 변화하는 시대의 기운을 모은 세운상가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