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혐오’와 ‘사랑’이라는 인간의 미약한 논리 구조와 형이상학 지식으로는 차마 그 본질을 모두 헤아릴 수 없으며 만사의 근원이 되는 두 본질에 관한 고찰이다. 본론에 앞서 이 글은 혐오와 사랑을 갈라놓으며 사랑이라는 가치만을 추앙하고 혐오라는 가치를 멸시하는 글이 아님을 밝힌다. 혐오에 찌들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소소한 해방감을, 사랑의 실천 방법을 몰라 헤매는 이들에게는 사랑의 실천법을 제시하는 글이다. 이 글은 비문학도, 철학적 글쓰기도 아닌 그저 세상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청년 의 푸념 정도로 하겠다.
혐오의 대상은 존재인가 속성인가. 대부분 사람의 혐오라는 화살은 속성이라는 활 에서 놓아져 과녁은 결국 존재다. 혐오의 원인은 무궁무진하며 이는 한낱 인간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임을 인류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인종차별, 성별 갈등, 좌파와 우파까지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기인한 혐오와 갈등의 양상은 그 시기와 대상만 변화해 왔을 뿐 늘 우리의 곁에 공존해 왔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분열하지 않는 것인가?
나의 대답은 ‘사랑’이다. 먼저 이 글에서 다루는 ‘사랑’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이상 ‘이성이 만나 신체 반응이 촉발하는 설렘’과 같은 일차 원적인 호감을 다루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겠다. 모성애와 부성애 혹은 깊은 우정과 같이 그 원인을 규명할 수도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 도 없지만 우리를 뭉치게 해 주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반해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조건이 없는 베풂’을 ‘사랑’이라고 칭하겠다.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는 전부 내 사견이므로, 그 어떠한 비난도, 비판도, 공감도 환영한다. 결국 이 글 역시 나의 선험적인 명제이기에.
이상적인 사회에서 사랑은 ‘존재’에게 향해야 한다. 사랑엔 이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 이다. ‘속성’에 향하는 사랑은 결국 허상이다. 누군가가 외적으로 아름다워서 좋았다면 세월이 지나 늙어 버린다면 더 이상 좋지 않을 것이고 내가 특정 속성이 좋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속성을 혐오하게 나 자신이 변해버릴 수도 있다. 이처럼 속성을 향한 사랑은 한없이 나약하고 우유부단하다. 결국 ‘나는 너를 이러한 이유로 사랑해’가 아니라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네가 특정 속성을 지녀도 괜찮아’가 사랑의 본질임을 이 글을 통해 주장하고 싶은 바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개체의 속성에만 향해도 되는 혐오는 존재 전체로 확대돼서 남용되고 존재 자체를 사랑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일부분만을 아끼며 사랑을 절약한다. 사랑이 부족한 세상은 또다시 혐오를 잉태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러한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이 글을 적는 것이다. 적어도 나와 그대 들만큼은 보다 넓은 관용을, 보다 깊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길 기도한다. 베푼 만큼 그대들 역시 수많은 선택이 빚어낸 무한한 가능 세계 중, 가장 사랑받고 주변이 다정한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나가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