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라의 「바우어의 정원」(『Axt』, 2024년 11/12월호)은 주요 인물인 은화, 무재, 정림 등이 모두 배우들인 일종의 예술가 소설입니다. 일반 적으로 예술가 소설은 예술의 본질이라든가 예술의 시대적 역할을 탐구하고는 하는데요. 안타깝게도 순탄치 않은 역사를 살아온 한국문학에서 예술가 소설은 주로 예술가가 지닌 이상과 예술가가 살아가는 불우한 현실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랬던 상황에서 「바우어의 정원」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눈 내리는 풍경과 거룩한 분위기의 캐럴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세련되고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예술의 본질을 향한 탐색은 주요 인물들의 상처 극복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데요. 특히 상처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진실과 허구의 아이러니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은화는 나름의 명성을 얻은 배우지만, 세 번의 유산을 겪으며 커다란 상처를 갖게 됩니다. 유산의 상처는 은화의 삶에 깊이 잠재돼 있던 고등학교 시절의 상처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인데요. “원인 불명의 습관성 유산”이라는 진단을 받은 은화는 그 원인이 나이, 환경, 유전, 음식 등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마신 상한 우유를 떠올립니다. 은화가 아역 배우로 활동하던 고등학교 시절 아이들은 상한 우유를 상습적으로 은화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은화는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상한 우유를 벌컥 벌컥 마신 적이 있는데요. 반복되는 유산에 힘겨워 하던 은화는 “어렸을 때 마신 상한 우유가, 그 조그만 벌레들이 제 몸 어딘가를 돌이킬 수 없게 망가뜨려버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은화는 유산의 상처로 3년간 연 기 활동도 전혀 하지 못했는데요. 그런 은화에게 두 가지의 무대가 다가오고 그것은 상처의 극복에 있어 필요한 조건들을 성찰하게끔 독자들을 이끕니다. 첫 번째는 “살면서 여성으로서 겪은 상처를 독백 연기의 형태로 들려주”는 무대인데요. 연출가는 “연기라고 생각 말고 그냥 수다 떠는 자리라고 생각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은화에게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말합니다. 은화는 그 무대가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의 일(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을 완벽히 거스르는 작업”, 즉 ‘타인이 마음’이 아닌 ‘자신의 진심’을 말하는 무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약속했지만, 무대의 실상은 그 약속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은화가 오디션에 합격하자 연출가는 “비슷한 사연이 반복되면 관객들이 지루해 할 수 있다”며 세 번째 유산의 설정을 “임신 마지막 달에 사산한 걸로” 하자고 통보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사실의 발화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거짓을 종용하는 무대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오디션장에서 우연히 만난 연극계 후배 변정림과의 대화 를 통해 이뤄지는 무대인데요. 오디션을 받으러 간 자리에서 만난 정림 역시 은화와 마찬가지로 유산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정림을 오디션장에서 대학로 극장까지 태워다주는 은화의 차 속에 서 이뤄지는 둘의 대화가 허구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그 이면은 사실에 한층 가깝다는 점입니다. 무명이던 시절 은화는 정림과 함께 치료 워크숍 알바를 하곤 했는데요. 그 알바란 내담자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내담자의 말상대 역할을 해주는 일을 말합니다. 이때 은화나 정림은 내담자가 말을 하면 “그 말 을 들으니 나는……”으로 이어지는 대답을 하고는 했는데요. “그 말을 들으니 나는……”이라는 문구는 이미 정해져 있는 규칙이지만, 이 말을 들은 내담자는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경청한다는 생각에 깊은 상처를 털어놓고는 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재회한 은화와 정림은 같은 차를 타고 가며 자신들을 오디션에서 심사했던 연출가를 비판하며 오래전 사용했던 “그 말을 들으니 나는……”으로 시작되는 대화를 다시 시도합니다. 은화와 정림은 모두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이라는 구절이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전까지의 의례적인 말 대신 마음 속에 있는 진심을 아낌없이 털어놓는데요. 둘의 진정한 대화는 무려 두 페이지에 걸쳐 펼쳐질 정도입니다.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독백 연기의 무대’와 ‘차 안의 무대’는 이처럼 서로 상반됩니다. 전자는 진실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제3자의 개입과 재단을 통해 그 상처가 드러났던 것에 비해 후자는 연극적 장치를 표나게 내세웠지만 있는 그대로의 상처를 드러냅니다. 두 개의 무대에서 상처의 극복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서입니다. 그렇기에 은화는 오디션에 통과한 이후에도 독백 연기를 하는 무대에는 오르지 않을 것을 결심하는 것이겠죠. 혹시 여러분들은 약간의 허구를 가미해 진실을 발화하는 ‘차 안의 무대’가 소설을 포함한 예술의 상징처럼 보이지는 않나요. 본래 예술이란 사실(fact) 그 자체일 수는 없지만, 허구를 가미해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진실 (truth)을 드러내는 영역이기 때문 입니다. 허구를 전제할 때 오히려 진실에 다가선다는 이 기묘한 아이러니야말로 소설을 포함한 예술(인공적 창조물)의 중요한 존재 근거 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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