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온다. 누군가는 미리 접어둔 우산을 다시 꺼내고 누군가는 여름 햇살을 미처 누려보지도 못한 채 빗소리에 하루를 건넌다. 늘 이맘때면 우리는 무언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말고사, 보고 서, 스펙, 자격증. 쏟아지는 빗줄기만큼이나 정해진 마감들이 우리 어깨를 두드린다.

  하지만 비는 참 이상한 계절의 감각이다. 걸음을 느리게 만들고 낯선 기억을 데려오고 무심하게 지나치던 골목의 색까지 문득 짙게 느껴지게 한다. 빗물에 번지는 거리의 불빛은 왜 항상 옛날 생각을 데려오는 걸까. 어느 여름날 젖은 운동화를 신은 채 집에 돌아가던 길, 처음 미래를 고민하며 눈을 감았던 밤, 우산을 같이 썼던 누군가의 체온처럼 지금은 없지만 확실히 존재했던 감정들이 조용히 떠오른다.

  장마는 지루하다는 이름을 달고 오지만, 그 긴 우중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라난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날들이 이어져도 그 불확실함 속에서 나의 방향을 고집스럽게 찾는다.

  진로는 늘 답이 없는 문제 같다. 누가 정해 주는 것도 어디엔 정답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외롭고 그래서 더 막막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 불안한 길 위에 내리는 이 비도 무언가를 잊지 않게 해주는 작은 신호일지 모른다. ‘흠뻑 젖어도 괜찮아, 이건 잠깐의 계절이니까’. 비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다독인다.

  그리고 사랑도 어쩌면 비와 비슷하다. 처음엔 따뜻한 빗방울처럼 다가와 언젠가는 우산 없이 서 있는 나를 적셔버린다. 비 오는 날 같이 걷던 그 사람의 웃음, 카페 유리창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 장마철이면 늘 같은 노래를 틀던 기억. 지금은 흘러 버린 그 마음도 이 계절만 되면 유독 선명해진다.

  그때 더 용기 내어 붙잡았더라면, 그때 조금 덜 무서워했더라면. 이 빗속에 뒤섞여버린 후회들이 가끔은 내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도 진로처럼, 삶처럼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더 아름다웠던 걸까.

  나는 자주 생각한다. 이 빗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어디까지 왔는지를. 어디까지 흘러가야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만날 수 있을지를. 누군가는 진로를 정하고, 누군가는 아직 망설이고, 누군가는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티는 데에 집중한다. 모두가 제각각의 속도로 걷고 있는 비 오는 교정에서 우리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간다.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한 이 장마 속에서 당장 비가 그치기를 바라기보다는 이 빗 속에서도 내가 나일 수 있는 감각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오고, 햇살이 돌아오더라도 우리는 이 장마의 감정을 기억해야 한다. 흔들렸고, 고민했고, 그럼에도 나아가던 지금 이 순간을.

  그러니 오늘만큼은 우산을 천천히 펴고 흠뻑 젖어도 괜찮다는 듯 한 걸음씩 걸어보자. 누구보다 나에게 충실하게. 그리고 언젠가,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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