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토록 이어질 것 같았던 나의 성장기에도 마침내 종지부가 찍혔다. 손목과 발목이 드러나도록 짧아지는 옷소매와 세상을 보는 높이를 그어 만든 나이테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 됐다. 다만 시간만이 내가 잃은 만큼의 성장 가속도를 붙여 달려나가고 있을 뿐이다. 어제와 오늘을 구분할 수 없고, 작년과 올해의 차이를 실감할 수 없다. 내게 한 겹 두 겹 정성스레 입혀주며 오늘과 다른 내일을, 잡히지 않을 것 같던 유년기의 끝을 기대하게 만들던 시간은 이제 서늘한 바람으로 돌아와 한 뼘씩 나를 덜어가게 됐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쳐 한 움큼 쥔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것은 비단 탈락하는 세포와 기억뿐만이 아니라 곁에 영원히 있으리라 믿었던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부고였다. 담담히 ‘돌아가셨다’ 전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온 목적지를 물었을 정도로. 심장마비라니. 내가 아는 사람 중 봄날의 햇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던 사람은 오래도록 기다린 아이의 첫돌을 앞둔 8월의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한 곳에서 오래 일을 하다 보면 거쳐 가는 사람들이 많다.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것은 빈번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보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나보다 먼저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던 얼굴이 마지막이라는 게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 기분은 꼭 잘못 삼킨 사탕처럼 목에 걸려서 차마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세상이 거대한 엘리베이터 같다고 생각한 적 있다. 시간이 흘러 다음 층에 멈춰 설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타고 내리면서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다가 각자의 층에 내려 자신의 방에서 잠에 든다. 무수한 탄생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시간선을 겹치고 이어가는 것이 삶이기에 그 시작이 제각각이듯 맺음 또한 제각각인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예정돼 있는 끝을 향해 달려 나가며 상실을 마주하게 된다. 베란다에 두고 깜빡 잊은 화분, 어항 속의 물고기, 어렸을 때부터 함께였던 고양이, 그리고 스크린 너머 연예인처럼.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고 믿었던 것들도.
영원은 모든 의미를 무용하게 만든다. 그동안은 막연히 오늘 있었던 것이 내일로 계속 이어지리라 믿고 있었다. 내일도 평범하게 학교에 가고, 현관을 열면 고양이가 반기며 가족들이 곁에 있는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은 각자의 속도로 달려 나가면서 쉼 없이 변화하고 있지만,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내일 보자며 인사하는 친구, 명절마다 맛있는 것을 챙겨 주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장 든든한 내 편이 되어주는 엄마, 아빠. 작게는 내 기억을 이루며 크게는 내 일상과 자아를 이루는 존재들도 언젠가는 상실의 흔적만을 남긴 채 곁을 떠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것은 의미가 된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유한한 자원을 소비하곤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기도,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가장 유한한 것은 단연 시간이다. 무엇에 시간을 쏟는지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나타낸다. 한 사람의 시간이 끝나고 그를 기억하는 모두가 함께 검은 책장을 덮었을 때, 그곳에 놓여 있는 이야기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를 껴안고 살아간다. 그러니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우리’에게 내어주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시간을 쏟자.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시간이 흘러 그 사탕이 녹아 사라졌을 때 혀 끝에 맴도는 단맛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