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동작대교를 건너며 마주하는 한강의 풍경, 아파트 단지 공사장의 타워 크레인은 오늘도 지칠 줄 모른다. 병풍처럼 늘어선 2세대 강변 아파트들을 재생산하는 모습. 더 높아지고 촘촘해진 무채색의 열주, 지난 세대 넓적한 판상 아파트를 대신해 세워지는 더 두텁고 훌쩍 높아진 부의 성벽이다. 재건축되는 한강 변 도시 풍경과 함께 “한강 르네상스”라는 말이 오랜 기간 꾸준히 표어로 등장한다. 요즘 다방면에서 차용되는 “르네상스”는 대체 어떤 욕망이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다시 태어났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주로 긍정적인 표현인 르네상스에 대해 다양한 학계의 시각이 존재한다. 특히 조각이나 회화와는 다르게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을 논해야 하는 서구의 건축 연구자 사이에서 상반된 두 주장이 발견된다. 당연히 그 한 축은 우리가 교과서로 알고 있는 “부흥”의 르네상스다. 그리스와 로마 고대 문명의 재발견을 중심으로 중세 신적인 세계관에서 세속적인 인간에 관한 관심으로 이동한 “인본 중심”의 르네상스가 근대 건축의 서막을 열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르네상스 하면 떠올려지는 해방, 부흥의 이미지는 보통 14세기 피렌체를 중심으로 북부 이탈리아의 새로운 도시 에너지와 탁월한 건축가들의 작업,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막대한 후원과 공화주의로 대표된다. “개인”이 새롭게 발견되고 종교와 분리된 세속적인 근대 세계가 원근법, 건축의 신기술, 대칭과 비례, 미에 대한 변화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건축과 도시의 탄생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민적 인본주의(Civic Humanism) 해석 반대편에는 르네상스의 “부흥”이나 “인본”과 같은 긍정적 의미를 전면 해체하는 주장이 있다. 그 중심에는 후대에 전달된 르네상스가 15세기 당시 실제 모습을 정확히 반영하기보다, 유럽 문화의 급격한 확장기인 19세기에 선별된 자료의 학술적 해석에 의지해 신화를 창조했다는 견해다. 유럽의 입맛에 맞춘 서사는 주로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문화적 연계를 생략한 “하얀 그리스”로, 이 문화적 뿌리를 되살린 르네상스 또한 유럽이 이룩한 찬란한 19세기 예술과 건축의 환영을 전달한다. 르네상스 시대, 새롭게 열린 고전에 관한 관심이 근대의 문을 열었다는 해석과 중세로 구분된 이전 시대를 “암흑” 같은 부정적 이미지로 투사한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이 의문 중 하나가 당시 “건축가”와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이끈 문화 운동의 광범위한 성격이다. 도시민의 생활과 분리된 전문가들의 지적 편향은 당시 도시와 건축을 지나치게 관념화해 엘리트를 위한 지식 활동과 이론 중심으로 국한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 대수학과 기하학에 기댄 절대적 공간 질서는 시민적 자유를 담았기보단 이미 굳혀진 권력 질서를 강화하는 “합리성”의 수호자다.
르네상스 시대에 꽃핀 수학과 기하학의 ‘합리성’은 밀라노의 폭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위해 구상된 이상 도시 ‘스포르친다(Sforzinda)’ 계획에서 그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다. 두 개의 정사각형이 중첩된 이 도시 계획은 명확한 선과 악의 이상을 담은 건축과 완벽한 형태를 통해, 시간 속에 영원히 갇힌 불멸의 도시를 염원했다. 새롭게 부상한 르네상스의 도시 권력은 이처럼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광장을 정치적 위상과 부를 과시하는 공적 스펙터클의 무대로 상상했다. 이 해석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알려진 르네상스의 ‘공화정’ 이미지에 상당한 충격을 던진다. 마치 20세기 초 독재자 무솔리니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도시 축제와 거리 행진을 부활시켰듯, 르네상스에 대한 역사적 서사, 특히 시민적 자유와 해방에 관한 신화들 역시 현대에 들어와 특정 목적에 맞게 취사 선택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문화와 예술사의 백미 르네상스, 이 핵심 사건에 대해 대립한 시각은 결정적인 사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쉽게 하나로 합의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흥미로운 이 두 관점의 평행선에서 천편일률로 전달되고 있는 유럽 건축 지식의 한국 유입을 되돌아본다. K-문화가 전지구에 어필하는 지금, 거의 세뇌에 가까운 일방적이고 고정된 유럽 건축사와 도시사 교육은 필자가 35년 전 대학 시절에 겪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이럴까? 다른 어떤 분야보다 코마로프가 말한 “의식의 식민화(Colonization of Consciousness)”와 시대착오적 유럽 중심주의 주입 장이 된 한국 건축 교육에서 발음도 어려운 그리스와 이탈리아어의 건축물을 외우고 되새기는 신세대 건축학도들의 모습이 강변 거대한 새 아파트 위로 우울하게 중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