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던 시절, 삶이 책이라면 그 삶의 한 페이지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요? 누군가는 그 페이지를 몇 번이고 돌려보고, 좀처럼 손에서 놓지 못해 애써 붙잡고 있겠지요.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를 타듯, 모든 인연에도 때가 있다는 뜻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이별을 포함해 우리가 지나온 여러 시절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 그 주변 환경이라는 조건들이 서로 어우러진 하나의 페이지입니다.
어떤 인연은 아주 깊고 오래 머물다가, 어느 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인연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생각보다 짧게 머물다가 떠나기도 하고, 혹은 오랫동안 머물러 고정된 페이지처럼 자리 잡기도 하지요. 즉, 어떤 인연은 지금 이 시절, 이 계절, 이 마음 상태에서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그 시간이 지나면 애써 붙잡으려 해봐도 자연스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친했던 친구와의 관계도, 그와 나눴던 대화도 웃음도 그때가 아니었다면 만나기 어려웠던 인연이었으며, 그 시간이 지나 많은 것이 변한 지금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머무르기 어려운 인연이 돼 흩어져 버린 것일 테지요.
그 ‘머무름’과 ‘흩어짐’ 사이에서 우리는 상처받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흩어짐이 결국 하나의 경험이 되어 우리를 조금 더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시절 인연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겪고, 그 이별 덕분에 성장했으며, 시간이 흐른 뒤에 미화된 시절의 페이지를 온전히 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이별이 쉽겠습니까. 그 이별의 상대가 나에게 큰 의미였을수록, 함께 나눈 기억이 많을수록 그 이별은 더 깊고 큰 상처를 남깁니다. 하지만 상처로 가득했던 이별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이별 덕분에 단단해지고 조금은 더 성숙해진 나 자신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 이별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도 있고, 허전함과 후회, 자책으로 가득 찬 마음이 꽤 오랜 시간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더 붙잡지 못한 후회, 더 애쓰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인한 슬픔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면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슬퍼한 만큼 그 관계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관계 속에서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했으며 멈추게 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결국 이별, 즉 흩어짐은 스스로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고 어른이 되어갑니다. 흩어진 시절 인연이 남긴 상처와 흔적을 스스로의 성숙으로 정리해 보며 그 자체로 깊어진 삶을 살아가는 어른이 되어가길 바랍니다. 지나온 시절과 지나갈 시절 그 모든 페이지에 아름다운 성숙이 머물렀길, 머물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