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라는 정신분석가이자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론이 어찌나 난해한지, 라캉이 죽었을 때 한 신문에는 “자크 라캉을 이해하던 유일한 지구인이 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부고 기사까지 실렸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입니다. 갑자기 자크 라캉이 생각난 이유는 이희주의 「사과와 링고」(『릿터』, 2025년 4·5월)를 읽다가 자크 라캉의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 개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희주의 「사과와 링고」에는 한 살 차이가 나는 사라와 사야 자매가 등장합니다. 서른두 살의 무기계약직 여성인 사라는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 값을 아낄 정도로 알뜰하게 살아갑니다. 이에 반해 동생인 사야는 사라를 비롯한 가족의 돈을 맘대로 쓰가며, 자유롭고 럭셔리하게 살아가는데요. 사라는 마치 사야를 돌보기 위해, 사야는 사라의 돌봄을 받기 위해 태어난 자매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라캉은 인간 정신의 구조와 형성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개념을 주장했는데요. 상상계에 머물던 아기는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결핍을 가진 주체가 된다고 합니다. 이때 상상계는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로서, 타인이란 아기의 거울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이랬던 아기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비로소 상징계에 진입하는데요. 이때에야 비로소 대타자의 규칙과 질서를 내면화하고, ‘나’와 타인도 구별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서른이 넘은 지금도 언니 사라를 비롯한 가족들의 돈을 맘대로 쓰는 사야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상계의 아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을 “모여 사는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라”와 달리, 사야는 “가족을 정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야가 “가족의 돈도 자기 돈”이라 여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사과와 링고」에는 ‘상징계(사라)/상상계(사야)’라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는데요. 작가는 이분법의 설정과 더불어, 그 이분법의 빗금을 흐릿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상징계에 속한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제 사라 역시 상상계에 속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라캉 이론에 따르면 주체는 결코 상징계에 완전히 안착할 수 없습니다. 상징계는 외부의 규칙과 언어를 통해 주체를 구조화하지만, 상상계에서 비롯된 환상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징계(사라)/상상계(사야)’라는 이분법의 해체는 작품의 제목에서부터 나타나는데요. 사과와 링고는 사야가 기르는 고양이들의 이름입니다. 알다시피 링고(りんご)는 사과를 의미하는 일본어 단어입니다. 같은 대상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사과와 링고’라는 제목은, 서로 다르지만 닮은 사라와 사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라’와 ‘사야’라는 이름 자체도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사라는 시종일관 세상의 종말을 꿈꾸는데요. 사라가 생존 이외의 활동으로 유일하게 돈을 쓰는 대상은 “종말에 대한 철학적인 대화가 중심”인 뮤지컬 <더 라스트>입니다. 놀랍게도 사라가 “간절히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종말인 것입니다. 마지막에 사라가 두 마리 고양이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것은, 상징적인 방식으로나마 자신이 꿈꾸던 ‘종말’을 감행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조금 비약이 될 수도 많지만, 늘 자신과 세상의 종말을 꿈꾸는 사라의 심리는 히틀러의 유사한 병리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히틀러는 패망 직전 "내(독일)가 패배한なら 세계도 함께 사라져야 한다"는 식의 종말론적 심리를 보였다고 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이와 같은 자기파괴적 전체주의는 상상계에 고착된 주체의 병리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상계에서는 자신과 타인, ‘나’와 세계의 구별이 없기에, 자신의 실패는 자연스럽게 세계의 종말로 이어져야 한다는 욕망을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야를 향한 사라의 감정이 조금 과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과와 링고」는 “죽었다는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야에 대해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그것뿐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될 정도입니다. 이것 역시 상상계의 중요한 특징인 나르시시즘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나르시스트는 절대의 자기를 상정하기 때문에, 감히 범접해서는 안 될 자신과 ‘커다란 차이’를 지닌 대상에 대해서보다도, ‘사소한 차이’를 지닌 대상에 대해 오히려 더 큰 증오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사라가 사야를 못 견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연년생에, 같은 초중고”를 다녔으며 말투마저 비슷한 사야의 ‘사소한 차이’ 때문일 겁니다.

  한때 사라는 “전능한 언니로 보이고 싶어 쿨한 척했고, 실제로 쿨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 역시 상상계에 고착된 사야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라는 사야를 돌보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려는 상상계적 욕망을 투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과와 링고」의 사라와 사야는 어쩌면 동일한 욕망과 결핍을 비춰주는 두 개의 이름, 곧 하나의 사과이자 링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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