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의 「빈티지 엽서」(『Axt』, 2024년 11·12월)의 그녀는, 평범함이 유일한 개성일 정도로 평범한 중년 여성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15년째 자전거 대리점을 꾸려가며, 최근에는 중국산 고춧가루를 팔지 말지를 고민합니다. 일하느라 여행은 엄두도 못 내는 그녀가, 당뇨 초기 진단을 받고 헬스장에 다니면서 모든 일은 시작됩니다. 그녀는 헬스장에서 파란 바지의 남자를 만나는데요. 남자로부터 스쾃 자세를 조언받고, 러닝화를 추천받으며 조금씩 친해집니다. 남자는 해외에서 사 온 ‘빈티지 엽서(실제로 사용된 엽서)’를 취미로 수집해왔는데요. 그녀가 “갑자기, 우연히, 의도하지 않게” 그 엽서를 해석해주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그녀의 성격이 그러하듯이, 얼핏 보기에 이 작품도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소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는데요. 저는 엉뚱하게도 「빈티지 엽서」가 20세기 후반 서구 지성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해체주의를 그 어떤 철학책보다도 훌륭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혔습니다. 해체주의는 모든 텍스트가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고, 모순과 차이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봅니다. 「빈티지 엽서」에는 여러 가지 ‘텍스트’가 등장하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오독(誤讀)을 불러올 뿐입니다.

  이 작품에는 먼저 ‘빈티지 엽서’라는 텍스트가 존재합니다. 남자가 해외에서 구매한 빈티지 엽서에는 낯선 외국어가 가득 적혀 있는데요. “빛바래고, 뭉툭해지고, 번지기까지 한 빈티지 엽서”는 누군가에 의해 해독되기 전까지는 단순한 사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전공했으며, 한때 통역사를 꿈꿨던 그녀는 남자에게 엽서 글귀를 해석해 줍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외국어를 온전히 해석해낸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일 수밖에 없기에, “때때로 그녀는 얼버무렸고, 뜬금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벌었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터무니없는 해석을 늘어놓”습니다.

  그녀의 해석이란 “힘껏 추측했고 유추했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인데요. 그 결과 그녀의 읽기를 통해 진정으로 의미를 얻는 것은 빈티지 엽서라기보다는 바로 그녀 자신입니다. 그녀는 엽서를 읽으며 “자신이 상실했다고 여겼던 자신”을 되찾는 기분과 “자신 안에 여전히 수준 높은 소양과 지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겁니다. 빈티지 엽서가 지닌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런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상상력”이 내면의 뭔가를 일깨운 결과겠지요.

  두 번째 텍스트는 ‘그녀와 남자의 관계’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동네 카페나 공원에서 함께 무언가를 골똘히 읽는 ‘그녀와 남자의 관계’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냅니다. 자전거 가게에 온 2층 세입자 여성은 그녀에게 “어떤 남자랑 카페에 앉아 있던데?”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노인은 차가운 말투로 “같이 다니는 그 아저씨, 식구 아니지요?”라고 준엄하게 추궁합니다. 나중에는 헬스장에 “헬스장은 운동하는 곳입니다. 운동만 하세요. 양심에 어긋나는 부적절한 관계, 몹시 불쾌합니다!”라는 경고장이 붙는데요. 이런 상황에서도 “거리낄 게 없는 그 남자와의 만남, 지극히 순수한 엽서 읽기 활동”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과 남자의 관계’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믿습니다.

  세 번째 텍스트는 바로 ‘그녀의 마음’입니다. 그녀는 ‘순수한 마음’으로 남자와 함께 빈티지 엽서를 독해한다고 자부합니다. 거기에는 남자를 향한 딴마음이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과 남자의 관계를 오해(오독)하자, 그녀는 남자를 만나 엽서 읽기를 그만두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저희만 떳떳하면 되는 거잖아요. 고작 엽서 읽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도 알겠죠. 그냥 별일도 아니었구나, 하고.”라고 덤덤하게 대답하는군요. 그런데 이 순간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녀는 남자가 엽서 읽기 행위가 정말이지 순수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과 남자와의 만남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처럼 「빈티지 엽서」에서는 그 어떤 해석도 오독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해란 오해의 별칭일 뿐입니다. 나중에 그녀의 남편은 프랑스어가 적힌 빈티지 엽서를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는데요. 그녀는 프랑스어를 모르면서도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에요.”라고 읽어주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사는 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늘 더 큰 용기를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텍스트의 의미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지연되었던 것처럼, “그녀의 일상은, 삶은 언제나 상반된 그 두 가지 마음 사이 어디쯤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해체주의는 의미의 절대성을 깨뜨리고, 억압된 타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철학사상입니다. 해체주의에서 오독은 오류가 아니라 텍스트의 다층성과 유예된 의미를 드러내는 필연적 결과인데요. ‘빈티지 엽서’를 만나기 이전 그녀는 중년 여성이라는 기존의 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절대적인 의미, 언어, 자아, 진리 등을 부정하는 해체주의의 우등생이 된 그녀는 스스로가 텍스트임을 자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기에 그녀가 펼쳐 나갈 무한한 가능성의 삶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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