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꿈을 안고 마련한 건축 책을 몇 페이지 넘기다 보면 다양한 기둥과 변천을 보여주는 그림들로 가득하다. 도리안, 이오니아, 코린트, 튜스칸처럼 집을 만드는 기둥에 관한 관심은 유럽의 고전 건축을 상상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고정된 출발점이다. 건축물이 중력과 바람 등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들을 이겨내는 데 필수적인 기둥, 그러나 20세기 초 시작된 근대주의 건축에서 기둥은 양식과 장식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한 시스템과 구축의 사고로 진화한다.
이 사고의 정점에 1914년에 등장한 도미노(Dom-ino) 이론이 있다. 최소한의 기둥으로 슬라브를 지지하고 한편에 각 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만든 철근 콘크리트의 열린 프레임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독일의 벨기에 침공으로 생긴 난민을 위해 스위스계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제안했다. 개념적으로 콘크리트 대지로 작동하는 바탕에 사용자가 자신의 집이나 정원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기둥, 슬라브로 이루어진 무한 확장의 시스템이다.
열려 있는 가변성과 사용자 스스로 주거 공간을 계획하는 매력의 도미노이론, 역설적이게 이 단순함이 20세기 산업사회의 경제성과 효율을 결합해 원래 의도인 지지 시스템의 성격을 금세 잊게 만든다. 20세기 동안 수없이 세워진 일상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은 단순한 도미노이론이 원형이 돼 여러 방식으로 변형되어 있다. 한국의 근대주의 건축 수용에서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도미노이론, 쉽고 빠른 건설 방식이 곧 대상으로서 ‘건축’ 그 자체가 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오피스 주거 등에 두루 적용된 이 이론에서 기둥이 가지는 야누스적 모습이다. 효율과 편의를 기반으로 도시 상황에 적응한 기둥은 아무도 인식 못 하는 사이 경제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어디서나 적용 가능한 형태와 보편적 미학으로 정착해 있다. 인간 척도를 강조하고 휴머니즘을 지향했던 근대주의 건축, 그 후손인 한국의 공동 주거와 상업시설들은 왜 하필 사람보다 자동차 규격에 맞춰 재단된 비-인간적 기둥이 되었을까?
고층 상가나 오피스처럼 기둥이 두드러진 건물을 설계할 때 많은 건축학도는 이제 사람보다는 자동차를 먼저 떠올린다. 전체 디자인을 지배하는 꽉 짜인 모듈과 이를 대표하는 기둥들, 모두 자동차에 맞춰져 있다. 아마 이 경향은 AI GPU 기지나 퀀텀 컴퓨터 시설, 자동화 물류창고, 데이터 센터 등, 인간 척도를 뛰어넘는 거대 건축으로 빠르게 이행할 것이다. 사람의 정주보다 배터리나 실리콘, 기계에 맞춘 온도와 먼지 없는 실내, 주-객이 뒤바뀐 공간을 받치는 비-인간적 기둥이 못마땅하다.
근대주의 건축으로 만드는 경제와 효율의 자동화 공간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질문이 우리 시대 건축에 던져져 있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 수직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그리고 지금까지 프로그램으로 정의한 공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이제 기둥에 모이고 있다.
84세의 건축가, 이토 도요오의 Sendai Mediatheque는 20세기 도미노이론으로 점철된 근대주의 건축의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거부한다. 대신 꼬아 올린 철골 프레임은 건물의 무게를 분산한 행위의 장(場)이자 비워진 공간이다. 기둥은 사라지고 수직으로 쌓은 열린 판을 지탱하는 튜브가 나타난 것이다. 지난 세대에 등장한 기둥에 대한 도전은 그를 추종하는 일련의 젊은 건축가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중 가장 도발적인 차세대 건축가로 이시가미 준야가 있다. 그가 보여준 KAIT(Kanagawa Institute of Technology Workshop)의 공간은 미세한 기둥이 모인 숲의 건축이다. 마치 숲에 온 것 같은 기둥들 때문에 어디가 자연이고 어디가 인공인지 구분이 안 된다. 너무 가늘어진 기둥은 자신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거부한다. 마치 숲을 이룬 개별 나무처럼, 305개의 얇은 철골 기둥은 하나하나 모두 다른 모습이다. 사용자는 숲을 거닐듯 원근법이 파괴된 수많은 기둥의 실내를 마음껏 다닐 수 있다. 여기서 건축 프로그램은 기둥 사이 의자 같은 소품으로 사용자 스스로 만든 경계에 의해 발생한다.
2018년 가을, 우리 학생회관 블루큐브에서 강연한 이시가미 준야가 생각난다. Sendai Mediatheque와 KAIT, 21세기 가변과 자율의 내부를 보여주는 새로운 건축의 모습이 이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합리와 효율로 포장된 기계를 위한 비-인간의 건축을 넘어서 푸른 꿈을 향한 “기둥 없는 건축”이 한국에서도 등장하길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