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보편적인 사건인 동시에 개인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공통된 경험이라는 차원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체험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주란의 「겨울 정원」(『문학동네』, 2025년 봄호)은 청소일을 하는 노년 여성을 통하여, 사랑의 두 가지 얼굴을 차분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기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60살의 여성이 있습니다. 오피스텔에서 청소일을 하는 혜숙은 수십 년을 혼자 살아왔으며, 현재는 소설 쓰는 딸 미래와 함께 지내는데요. 이 작품의 상당 부분은 혜숙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할애되어 있습니다. 잠을 푹 자지 못해 하루에 열 번쯤 자다 깨다 하는 삶, 딸이 사준 텀블러 덕분에 청소하면서 겪는 갈증을 간신히 면하는 삶, 동창들 단체방에서 짧은 메시지는 보낼 수 있지만 긴 메시지를 보내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삶이 시시콜콜하게 그려지는 겁니다. 혜숙이 일하는 곳의 소장이니 주임이니 경비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혜숙과 같은 계약직입니다. 노년에 접어든 혜숙은 마치 모든 꽃들이 시들어버린 ‘겨울 정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혜숙의 삶은 사랑과는 무관해 보이는데요. 실제로 혜숙은 자신이 “평생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겨울 정원」에서 사랑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사건입니다. 딸인 미래의 추천으로 혜숙은 큰 글자 도서 모임에 나가는데요. 그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교양이 있어 보이며, 중졸의 학력인 혜숙이 이해할 수 없는 ‘에파누이스망(Épanouissement,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모자랄 것 없이 충만하게 개화한 상태)’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교양뿐만 아니라 인간미를 뽐낼 만한 일화들도 서로 나누는데요. 첫 모임을 마친 혜숙은 이제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오인환에게 전화가 걸려 오면서 혜숙에게도 사랑이 시작됩니다. 사랑은 혜숙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혜숙은 오인환과 거의 일 년 동안 매주 만났고, 전국 팔도 축제란 축제는 다 다니는데요. 오인환을 만나면서 혜숙은 자신의 옷 단추가 플라스틱이 아닌 진짜 조개인 트로커스(Trochus)라는 것도 알게 되고, 일을 시작하기까지의 45분간 삶을 어떻게 살면 좋을지 알려주는 유튜브를 보거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기사들도 클릭하게 됩니다. 혜숙은 오인환과 교제하며 자신의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흐른다”고 느낄 정도인데요. 아마도 이러한 느낌은 연인인 오인환이 아침마다 혜숙에게 잘 잤느냐고 물어봐 주고, 소주를 한 병 나눠 마셨던 날 같이 있는 게 너무 좋다고 수십 번을 말하며, 혜숙이 고맙다고 했더니 고마우면 안 되고 사랑해야 된다고 속삭일 정도로 달콤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보편적인(universal) 얼굴뿐만 아니라 단독적인(singular) 얼굴도 기어이 혜숙에게 보여주고야 맙니다. 평소 혜숙은 프랑스 파리 등으로 해외 출장을 가고는 하는 오인환과 “난 어차피 안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곤 했는데요. 드디어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오인환의 두 딸이 혜숙을 찾아오는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그 딸들은 “아 언니, 저 아줌마인가 봐, 어떡해. 아빠 진짜 미친 거 아냐? 드라마를 찍고 있었네!”라고 말하면서 혜숙을 조롱하네요. 이후 혜숙은 조용히 자신의 사랑을 단념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혜숙은 오인환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혜숙은 왜 자신의 분노를 자신의 가장 소중한 대상을 향해 표출했던 걸까요? 그것은 혜숙이 처한 현실적 환경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혜숙이 하는 청소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피스텔의 쓰레기장은 너무나 더러워서 혜숙과 함께 그곳을 담당하던 경비는 그 일을 그만둘 정도였으니까요. 혜숙은 딸 미래에게 아무리 더럽고 힘든 일도 ‘난 그냥 참고 한다. 이제 와서 이런 걸로 분노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곤 했던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혜숙은 분노를 “하려면 할 수는 있는데, 누구한테 해야 하는지” 잃어버린 상태인 겁니다. 그렇기에 혜숙은 자신이 응당 오인환의 딸들에게 표현해야 할 분노를, 수십 년 만에 찾아온 사랑을 파괴함으로써 결국에는 스스로에게 표출하고야 만 것이겠죠.
결국 혜숙에게 사랑은 피해갈 수 없는 보편적인 얼굴로 다가왔지만 동시에 대신할 수 없는 단독적인 얼굴로 떠나가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확실성 앞에서 비로소 타인과 평등해지지만, 동시에 공유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독의 연대’라는 역설적 형태로 사랑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