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합정동 144번지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조선독립과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헌한 외국인과 그 가족의 묘가 500기 이상이 있다.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모셔진 이들 중 우리가 알 만한 인물을 몇 꼽아보자면,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을 설립한 베어드 박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의료기관인 제중원 의사로 정신여학당(현 정신여고)을 세우기도 한 엘러스 등이 있다. 서양 선교사들의 영문 묘비로 가득한 이곳을 돌아보면 한자로 된 묘비가 하나 눈에 띈다. ‘고아(孤兒)의 자부(慈父)’ 즉 ‘고아의 자애로운 아버지’라 새겨진 묘비의 주인은 소다 가이치(曾田 嘉伊智. 1867~1962)이다.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수백 명의 외국인 중 유일한 일본인이다.
양화진 묘원에 모셔진 외국인은 공통적으로 조선의 독립이나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하여 우리의 존경과 추모를 받는 사람들인데 ‘일본인’이 모셔져있다니.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아함을 느낄 법도 하다. 소다 가이치의 묘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의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기 때문이다. 소다 가이치가 조선과 연을 맺게 된 과정을 짧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다 가이치는 본래 고아를 돌보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일본의 야마구치 현 소네무라에서 태어나 오카야마에서 공부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25세에 노르웨이 선박 선원으로 홍콩에서 체재하다가 대만으로 가서는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의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다. 대만에서는 떠돌이 생활도 했는데, 어느 날 그가 만취한 상태로 길에 쓰러져 아무도 돌봐주는 이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때 이름 모를 조선인이 그를 업고 여관에 데려가 숙식비와 밥값까지 대신 지불해 주었다고 한다. 소다 가이치는 이름 모를 조선인이 보여준 선한 마음에 크게 감동해 은인의 나라 조선에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1905년 6월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황성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일했는데, 종교부 총무로 있던 월남 이상재 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으며, 식민지 조선의 참담함과 어려움에 눈을 뜨게 된다. 소다는 일본인 소학교 교사로 조선에 와 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 우에노 다키를 만나 결혼을 한다. 이들 부부는 제도의 미비와 사회적 무관심 속에 고통받는 조선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소다는 일본인 경성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백만 명 구령운동(1909년, 백만 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자는 복음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3·1 운동과 105인 사건 이후에는 조선인 청년지도자들의 석방을 촉구하며 조선총독 데라우찌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소다 부부는 가마쿠라(겸창)보육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는데 이 중에는 독립운동가의 자녀도 많았다고 한다. 일제의 패망 전까지 소다 부부는 천 명 이상의 조선 고아들을 돌봤다. 일제 패망 이후에는 부인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남고, 소다는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의 회개와 반성을 촉구했다. 소다는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61년 3월에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세운 보육원의 후신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생활하다가 1962년 3월 28일 95세로 타계한다. 이름 모를 조선인으로부터 받은 도움을 천 명 이상의 조선 고아를 사랑으로 돌보는 것으로 보답한 소다 가이치. 그의 사망 후(아직 일본과의 국교가 수교되기 전이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인에게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