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부문 당선작
1. 머리말
우리가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에 관한 질문은 인식론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식론에서는 먼저 지식의 유형을 명제적 지식, 실천적 지식, 직접적 지식으로 구분하고, 정당화 구조로서 토대론과 정합론은 명제적 지식을 활용해 나름의 인식적 정당성 제시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정당화 작업은 명제적 지식을 제외한 다른 유형의 지식을 배제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실패한다. 명제적 지식만을 취급할 경우 이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 전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이론에 국한된 인식적 정당화 작업을 수행할 뿐이다. 우리의 인식, 곧 앎과 지식의 정당화 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에 대한 풍성한 이해가 동반돼야만 한다. 이를 위해 지식의 세 유형의 정초관계,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제적 지식으로 구성되는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이고 직접적인 지식 사이에 대한 올바른 해명이 이루어져야하는데, 필자는 이것이 현상학에 의해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몸과 의식의 지향성에 관한 현상학적 이해는 인식에 대한 바른 폭넓은 이해를 제시해주며 동시에 기존 인식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부당한 전제를 명확하게 짚어준다. 결론적으로 현상학적 관점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논의돼온 정당화 논의가 사실 이론적인 지식에 국한된 작업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먼저 2절과 3절에서 정당화 구조로서 토대론과 정합론 그리고 이들이 전제로 하고 있는 지식의 세 유형을 요약한다. 다음으로 4절과 5절에서는 운동감각체계로서의 몸의 기능에 따른 세계에 대한 이해가 결부돼있다는 사실과 실천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이 엄밀하게 분리될 수 없는 지식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이어서 6절과 7절에서는 직접적 지식의 가능조건이 본질직관이라는 것과 직접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이 엄밀하게 분리될 수 없는 지식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마지막으로 8절에서는 현대 영미 인식론이 명제적 지식만을 정당화 문제에 반영하는 것이 여전히 논리실증주의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임을 밝힌다.
2. 정당화 구조로서 토대론과 정합론
현대 영미 인식론에서 인식에 대한 정당성을 구조적으로 해명하려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토대론과 정합론을 꼽을 수 있다. 두 입장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믿음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첫째, S가 지닌 믿음과 다른 믿음들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 가령 매리는 캔버스가 하얗게 보인다는 믿음B1에 근거하여 지금 백색등이 켜져있다는 믿음B2를 받아들인다와 같은 논리적인 관계를 설명한다. 둘째, S의 믿음B1이 정당화되기 위한 다른 믿음들과의 관계, 가령 매리의 캔버스가 하얗다는 믿음B1은 만약 적색등이 캔버스를 비춘다면 캔버스는 주황색으로 보일 것이라는 믿음B0를 전제한다와 같은 함축적인 관계를 설명한다. 이러한 목적을 지니고 토대론과 정합론은 인식의 정당화 구조가 어떻게 구축돼야하는지 즉, 믿음이 어떠한 인식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는지를 해명한다. 이에 대한 두 이론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 다음의 가정을 살펴보자.
매리는 산책 중에 멀리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목격과 동시에 어딘가에서 불이 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불이 났다는 그녀의 믿음B2는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른다는 믿음B1에 기초하여 정당화된다. 즉, 저 멀리서 불이 났다는 믿음B2는 후행적인데, 이는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는 최초의 믿음B1을 통해서 이차적으로 정당화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절차를 인식적 연쇄라고 한다. 왜냐하면 S가 가지고 있는 일련의 믿음들이 C1, C2, C3이고, C1은 C2를, C2는 C3를 기초로 해서 정당화된다면, S의 믿음들은 논리적인 연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인식적 연쇄는 토대론과 정합론이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논리이지만 이것 자체가 정당성을 확보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불이 나고 있다는 그녀의 믿음B2를 정당화하는 요소는 단지 감각적인 경험, 즉 검은 연기를 보는 믿음B1만으로 충분한 것인가 아니면 연소를 동반하는 발화현상이 존재한다는 제3의 믿음으로서 이론적 또는 경험적 믿음B0를 필요로 하는가?
먼저 토대론의 입장에 따르면 믿음B1은 자체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에 제3의 믿음B0가 요구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토대론은 믿음B1이 다른 믿음을 기초로 해서 정당화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라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믿음B1은 자명하고 일반적인 감각적 경험에 의해 그 자체로 정당화되거나 의심의 여지없이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출된 믿음이어야 한다. 즉, 믿음B1은 매리에게 분명하고 명석 판명한 경험적인 사실로서 믿음인 것이다. 토대론에선 이와 같은 믿음을 기초믿음이라 부르고, 이를 토대로 인식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토대론을 피라미드식 구조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으로 정합론의 입장에 따르면 믿음B1은 믿음B2와 믿음B0와 정합적이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정합론은 정당화가 어떤 믿음이 속한 믿음의 체계 내에서 다른 믿음들과 설명적으로 정합적일 때만 성립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합적이기 위해서는 믿음과 세계와의 대응 관계보다, 어떤 믿음이 다른 믿음들과 상호적이고 유의미하게 결합해야만 한다. 따라서 정합론에 따르면 믿음B2는 믿음B1과 믿음B0와 함께 고려돼야 하고, 이때 세 믿음 사이의 설명적 유관성이 성립하면 정당화된다고 여긴다. 이처럼 정합론에선 매리의 믿음B1을 지지하는 다른 제3의 믿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를 뗏목식 구조라 부르기도 한다.
토대론과 정합론은 정당화 문제에 있어서 위와 같은 서로 다른 인식 구조를 상정하고 있다. 요약하면 토대론의 경우, 믿음의 정당화는 다른 믿음으로 정당화가 되지 않는 기초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 반면 정합론의 경우, 믿음의 정당화는 믿음에 세계에 대한 긴밀한 반영을 요구하기보다, 믿음이 다른 믿음들과 합리적이고 풍부한 방식으로 정합하는지의 여부에 주목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토대론과 정합론의 해소되지 않는 논쟁이 진행 중이고, 이를 절충하려는 이론들 또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토대론과 정합론 그리고 두 견해를 종합하려는 입장들이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 때문에 인식론의 주요 과제인 정당화 구조를 온전히 확보하는 것에 궁극적으로 실패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논증하기에 앞서 인식론에서 명제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그리고 직접적 지식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살펴본다.
3. 지식의 세 유형
분석철학의 전통에 속한 인식론에서는 지식의 유형을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과 실천적 지식(knowing how) 그리고 직접적 지식(being acquainted with)으로 구분한다. 앞서 살펴본 토대론과 정합론이 상정하는 믿음은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에 속하는 일상적 행위, 직관, 기분과 느낌, 지각, 암묵적인 앎 등을 그 내용으로 삼지 않는다. 정당화 구조에서 사용되는 믿음은 오로지 어떤 명제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태도인 명제적 지식으로만 한정된다. 다시 말해, 인식론에서의 믿음은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의 표상 중 특별히 기술될 수 있는 명제에 대한 입장이다. 지식의 세 유형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철학에서―모두가 동의하는 구분은 아니지만―다수가 용이하게 분류하는 심적 상태의 세 유형을 참고하는 것이 유익한데, 이는 심리철학과 인식론이 영미분석철학 전통에 서 있기 때문이다.
심리철학에서는 심적 상태의 지평(mental landscape)을 태도(attitude)와 경험(experience) 그리고 행동(action)으로 구분한다. 태도는 언어적 지식, 믿음, 욕구, 상상, 지각에 대한 심적 상태로서 주로 명제적인 심적 상태이이고, 경험은 감각질, 의식, 자각, 기분, 느낌에 해당하는 심적 상태이며, 행동은 운동, 선택, 결정, 바람, 추론, 탐구에 해당하는 심적 상태이다. 심적 상태의 세 유형은 지식의 세 유형처럼 꽤 엄밀하게 구분된다고 할 수 있고, 분류에 있어서 상당 부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먼저 실천적 지식(knowing how)은 행동(action)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행인이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이나 작가가 타자를 치는 것 등의 일상적 생활, 야구선수가 공을 받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운동감각이나 우리가 가려운 부위를 긁기 위해 팔을 움직이거나 레이서가 반자동적으로 무게 중심의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는 암묵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이 실천적 지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무의식적인 행위의 동기가 되는 암묵적인 기분과 느낌이나 직관 역시 행동의 기전이 되기 때문에 행동과 무관한 개념이 아니다. 반면에, 명제적 지식은 명제 태도로서 명시적으로 인지하는 바에 대해 서술한 내용만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비명제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행위, 심지어 의식적 행위의 기반이 되는 암묵적인 행동 역시 인식론에서의 믿음의 내용이 되지는 못한다.
다음으로 직접적 지식(being acquainted with)은 경험(experience)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판단을 하는 것, 누군가를 여러 사람의 얼굴을 비교하며 찾는 것, 영화를 시각적으로 기억하는 것, 직관적으로 대상과 배경을 구분하는 것 등이 직접적 지식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직접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명제적 지식도 상당 부분 경험에 의존하지만, 이 둘은 다음의 이유에서 구분된다. 가령 매리가 빨간 사과를 본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매리는 자신의 마음에 빨강으로 인식되는 지각적인 상태 또는 빨강이라는 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지각적인 경험은 명제적 지식으로서 믿음을 전제하지는 않아 보인다. 즉, 지각된 앎은 ‘~로서 본다, 듣는다, 이해한다, 믿는다’와 같은 구체적인 진술이 포함된 명제적인 태도를 요구하지 않는 경험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과가 빨갛다는 경험을 가지기 위해서 매리가 자신의 마음에 빨강과 사과에 대한 개념이나 명제를 소유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명제적 지식은 기술(description)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매리에게 빨간 사과가 빨강으로서 보이는 방식의 설명에 대한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 “이것은 빨간 사과다”와 같은 인지적인 진술을 요구한다. 이렇게 명제적 지식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직접적 지식과 달리 언제나 대상의 술어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구분된다.
이와 같이 엄밀하게 분류되는 지식의 세 유형을 따라 토대론과 정합론은 명제적인 지식으로서 믿음만을 기초로 삼아 정당화 이론을 전개한다. 물론 정당성에 대한 논의에서 여러 유형의 지식 중 특별히 명제적 지식만을 취급하는 나름의 이유는 있다. 왜냐하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지적으로 수행되는 작업인데, 이 작업이 경험이나 행동과 구분되는 표상적 지식, 그중에서도 명제적 지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분석철학자들이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획은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에 대한 편협한 이해로부터 비롯한다. 즉, 우리의 실천적이며 직접적인 앎, 곧 일상을 살아가는 신체를 지닌 인격체로써 확보하는 세계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정당성은 무시하는 태도인 것이다. 결국 인식론의 거창한 프로젝트는 인식의 주체가 되는 인간을 거세시켜버린 근대적 의미에서 객관주의적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만 아니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작업의 다름이 아니게 된다. 4절부터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 그리고 명제적 지식의 정초관계를 중심으로 기존 인식론이 갖는 부당함에 대해 논증한다. 먼저 인식의 정당화 문제에서 실천적 지식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를 보이기 위해 메를로-퐁티의 몸에 대한 이해를 살펴본다.
4. 운동감각체계로서의 몸의 세계에 대한 이해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의 이념을 몸에 천착하여 몸의 현상학을 전개했다. 그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우리의 신체로 세계를 지각하는 한, 세계의 경험을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 소생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그러나 신체 및 세계와의 만남을 이와 같이 재파악하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될 것은 역시 우리 자신…왜냐하면…신체는 자연적 자아이자 말하자면 지각의 주체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여기서 신체는 단지 생물학적으로 파악되는 몸(physical body)이 아니다. 그가 정의하는 몸은 감각을 수용하는 수동적인 몸이자 동시에 세계에로의 의미를 부여하는 인식에 주체적인 몸이다. 이는 살아지는 몸(lived body)으로서 오늘날 신경과학이 인식의 장으로서 몸을 단지 감각되는 정보들을 처리하는 기관으로만 여기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인식을 감각을 기계적으로 해석한 결과에 부수적인 현상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사태에 앞서 작용하는 지향성을 지닌 몸적인 주체로 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물리주의가 암묵적으로 정신과 물리적인 속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과 달리, 우리의 인식이 이미 신체화돼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속성만을 체험에서 제거할 수 없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의 인식이 운동감각체계로서의 몸을 매개로 해 구성된다는 관점으로부터 비롯되는데, 특별히 실천적 지식이 명제적 지식에 앞서 세계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몸의 현상학의 이념에 따르면 실천적인 지식은 명제적인 지식에 우선하거나 언제나 동시에 발생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일상적이고 실천적인 일에 있어서 명시적이고 명제적인 앎보다 먼저 관여하며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명제적인 지식은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우리의 실천적인 행위가 선행돼야지만 형성될 수 있다. 가령 허리가 불편하여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는 것, 숨이 차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 기분 전환을 위해 기지개를 피는 것 등의 비자발적인 행위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명시적이고 명제적인 앎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나는 느낌과 기분의 차원에서 나의 상태가 어떤지 파악하고 있고 또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내가 정교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거나, 나의 태도를 반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실천적 행위를 위한 명시적인 앎이 언제나 요구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조차도 내가 명령하지 않은 몸의 비명제적이고 비자발적이며 자율적인 조정과 적응을 수반한다. 가령 시험지에 답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힘을 주어야지만 샤프심이 부서지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지, 자전거를 탈 때 무게 중심을 어디에다 줘야하는지, 목적지를 향해 걸을 때 대략 어느 정도 지점에 와있는지를 우리는 이미 실천적인 차원에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명시적이고 명제적이지 않은 행위가 반드시 무의식적 과정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대상에 몰두하고 있는 행위로부터 운동감각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적절한 태도변경(attitude change)에 의해서, 나는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나의 행위가 명시적인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곳에서조차, 나는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암묵적인 실천적 지식(tacit knowing how)을 소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식은 나의 주관의 외항으로 두어 객관화시키려 해도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그러한 앎이다. 왜냐하면 이미 나의 인식 주관과 존재론적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암묵적인 실천적 지식은 우리가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보여주는데, 이는 명제적 지식이 없이도 사태에 일관되게 반응하는 일반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신체적인 차원에서의 앎을 통해 명제적 지식에 앞서 우리가 실천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것이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몸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필연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상관자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의 몸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수동성의 조건으로서 존재해야 하며, 단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인식이 작동하는 과정에 부단히 개입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양분을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적인 존재로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명제적인 지식에 앞서 이미 세계를 바르게 조망하며 세계와 상호적인 관계를 성공적으로 맺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실천적 지식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지식이고, 당연히 정당화 문제에서 임의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다. 단지 실천적 지식은 명제적 지식으로 표현되지 않고 이론적 태도에 따라 설명되지 않은 미분화된 상태로 남아있을 뿐이다. 몸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정당화 문제에서 기초로 삼는 명제적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너무나도 인공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5. 실천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의 정초 관계
몸의 현상학을 통해 우리는 운동감각체계로서 몸이 수행하고 있는 일상적 기능을 총칭하는 실천적 지식이 대략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명제적 지식에 앞서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봤다. 그렇다면 명제적 지식에 맡겨졌던 인식론의 주요 과제, 곧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에 대한 답을 실천적 지식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실천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이 아주 긴밀한 연속성이 있다는 두 개의 논증을 통해 인식론의 주요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실천적 지식을 언어적으로 포착한 것으로부터 이론적 지식이 가능해진다. 행동양식으로서 실천적 지식은 우리의 삶에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작용하고 있다. 샤프로 필기를 하는 것, 계단을 오르는 것, 자전거를 타는 것, 글을 쓰기 위해 키보드 자판을 누르는 것, 깊은 사유를 위해 눈을 지그시 감는 것 등의 일상적인 행위의 동기나 과정을 언어로 온전히 설명할 방편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것들을 알고 실천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술어화된 지식만을 통해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않는데, 달리 설명하지 못해도 우리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매우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정당화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실천적 지식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대하는 신체적인 차원에서의 근원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에 대한 지적인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명제적 지식은 나의 주의를 일상적인 행위와 심적 상태 그리고 지각되는 사건에 초점을 맞췄을 때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사태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반성적 태도가 수반돼야하는데, 이는 언어의 도움을 받아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지향적 의식을 특정한 사태에 고정시켰을 때 비로소 분석적인 진술을 얻을 수 있다. 특별히 나의 행위와 관련한 사적 인식에 관한 진술이라면, 이것은 더욱이 나의 암묵적인 실천적 지식을 술어화시키는 작업일 수밖엔 없고 여기서부터 이론적 지식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명증한 정당성을 확보한 토대 위에서 도출된 결과이다.
둘째, 실천적인 지식을 결여한 이론적인 지식의 도출과 정당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먼저는 우리는 경험과 은유를 통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유에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경험은 잡다한 감각자료를 처리하는 인지과정만이 아니라, 사태에 여러 은유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그러한 행위까지 포함한다. 아동에게 여러 실천적인 교육들, 가령 발도르프 교육에서 도형 쌓기와 맞추기 등을 가르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결국 이론적 지식은 실천적 지식으로부터 형성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실천적 지식을 결여한 이론적인 지식의 도출과 정당화는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의 이유로 이론적 지식과 동일한 기능을 실천적 지식이 이미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가령 야구 경기에서 외야 수비수가 높게 떠오른 타구를 포구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를 위해서 수비수는 수 십 미터 떨어진 타석에서부터 타구의 방향과 속도 그리고 경기장에 부는 바람, 심지어는 야간 경기라면 조명에 따른 시야확보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때 수비수는 포물선운동과 대기역학 그리고 광학적인 지식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분명 수비수는 직관적인 판단과 수많은 훈련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 포구지점을 계산한다. 또한 바람의 방향과 세기는 피부에 느껴지는 시원한 촉감과 깃발이 펄럭이는 정도를 통해 알고, 공의 낙하지점은 타격 소리를 통해 알 수 있는 타구의 세기와 공의 연속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면서 예측할 수 있다. 만약 밝은 조명에 타구의 위치를 잃어버리면 적절히 눈을 찌푸리면서 공을 추적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실천이 이론적 지식과 정확히 같은 것으로 환원되지는 못해도 이와 기능적인 면에서 우리는 이미 동일한 능력을 수행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인식과 관련해서 실천적 지식은 어떤 이론이나 관점으로 술어화될 수 있는 잠재태이다. 다시 말해, 실천적 지식은 현상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반성하고 설명할 것인지에 따라 단순한 인지적인 재진술이 될 수도, 또는 과학의 법칙적인 설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론적인 설명보다 우선하여 존재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를 통해 실천적 지식을 결여한 이론적 지식을 도무지 도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마지막 이유로 이론적 지식의 정당화 문제에 이미 실천적 지식이 깊이 개입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를 과학철학에서의 인과와 관련한 문제에서 실천적 지식이 사실 우선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논증을 통해 해명하겠다. 먼저 과학철학에서 논의되는 인과와 관련한 문제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과는 기본적으로 일반화된 규칙성이고 이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귀납을 정당화해야 하지만, 귀납은 순환적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귀납적 추론 또한 관찰한 것으로부터 관찰하지 않은 것에 관한 믿음을 형성하는 습관에 불과한 것으로 귀납과 인과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은 주로 귀납의 정당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분명 의미있는 작업들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인과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 대응 방안 둘 다 인과를 그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으로서만 상정하기 때문에 인과의 문제가 난제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즉, 기존 논의에서 인과에 대한 실천적인 차원에서의 작용과 정당성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논지의 흐름상 인과의 정당성을 다루는 문제는 차치하기로 하고, 그 대신 기존의 인과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되고 있는 인과의 또 다른 측면을 간략히 짚고자 한다.
인과가 필연적인가 또는 존재하는가를 묻기 전에, 인과는 우리가 이미 삶에서 체득한 정당화된 지식이다. 왜냐하면 인과는 우리의 삶에서 언제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상과 관계 맺는 행위의 특징에 있어서 인과가 작용하고 있더눈 것이다. 단지 능동인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에 기대하는 반응, 인격체와 맺고 있는 다채로운 관계 방식 등이 일정한 패턴과 상호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모두 인과적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전제돼있는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대상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기대하는데, 이는 인과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인과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암묵적인 앎을 소유하지 못하고 언제나 의식적이고 회의적이고 불안하게 세상과 타인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실천적 지식을 통해 삶을 풍성히 살아내고 있고, 이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인과는 내버려 두고서라도 적어도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인과는 실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개념으로 남는다. 만약 귀납의 정당화와 법칙의 형이상학적 존재가 부정된다하더라도 우리의 일상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여전히 인과적 특징을 띨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인과법칙이 존재한다’는 상식적인 전제의 정당화 문제는 이미 인과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적인 존재의 인식에 후행하는 문제이고, 이는 실천적 지식이 일상적인 차원에서 먼저 정당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과학철학에서는 인과를 마치 우리의 인식 주관과 삶과 무관한 순전히 객관적인 대상으로서만 상정했기 때문에 명제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을 통한 접근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실천적 지식은 우리의 인식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게 될 수 있게 하며, 이뿐만 아니라 이론적 지식의 도출과 이를 정당화하는 문제에도 부단히 관여하고 있다.
6. 직접적 지식의 가능조건으로서 본질직관
앞선 5절에서 실천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간의 정초 관계를 논증하며 실천적 지식이 정당화 문제에서 배제될 수 없는 요소임을 살펴보았다. 이번 절에서는 직접적 지식이 단지 지각적인 앎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명제적 지식의 근원에서부터 이론적 지식에까지 작용하고 있음을 현상학의 주요한 이념 중 하나인 본질직관을 통해 논증한다.
본질직관은 본질을 보는 의식작용이다. 여기서 본질이란 어떤 대상을 바로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무엇이다. 즉, 본질은 사태의 핵심이고 근원적인 부분 또는 성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실과는 구분되는데 사실은 개별성을 지닌 존재로서 경험,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감각자료만을 통해서도 인식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의 개는 개별적인 사실로서 나의 개를 보는 것만으로 즉각적으로 인식되는 개체인 반면, 나의 개가 나의 개이게끔 하는 본질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곧 개를 생물학적인 종으로서 보는지 또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보는지에 따라 그 본질이 다르게 파악된다. 주목할 점은 본질은 근대적 의미에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으로 고정된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본질은 의미의 계기(moment)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 층위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를 젖병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갓난아이는 젖병에 대해 전혀 아는바가 없어도 젖병을 통해 분유를 마신다. 아이는 젖병이 어떤 재질이고 무엇에 쓰는 용도이고 젖병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해도 자신의 수준에서 젖병에 대한 본질을 이미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젖병을 활용한다. 즉, 아이의 수준에서 젖병의 본질은 입으로 물면 배고픔을 달래줄 액체가 나오는 생존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이는 성인이 젖병을 아이가 울 때 쥐어주는 도구로서 파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해이다. 이렇듯 본질은 아이와 성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드러날 수 있다. 내가 대상을 어떤 의미로 포착하는지 여부에 따라 본질은 다르게 인식된다. 하지만 우리가 본질을 어떤 의미로 파악하건 간에 우리의 인식과정에서 본질직관은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가 주관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본질직관 또한 명시적이고 암묵적인 단계에서 계속해서 수행되고 있다.
이러한 본질직관은 직접적 지식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는데 본질직관은 직접적 지식의 가능 조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직접적 지식은 경험적이고 비명제적 지식으로서 상대방의 얼굴을 아는 것, 음악의 선율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지금 어떤 기분에 처해있다는 것 등의 본질직관이 부단히 작용하는 그런 종류의 앎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음식의 맛과 음악의 선율 그리고 미적 아름다움을 언어로 풍성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무엇이 맛있는 음식인지, 무엇이 감동적인 음악인지, 무엇이 아름다운 작품인지 알 수 있다. 가령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면서 맛있는 음식에 대해 떠올릴 때, 우리는 먹어봤던 맛있는 음식들을 열거할 것이다. 비록 맛있음에 대한 적확한 정의가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맛있음에 대한 본질을 암묵적으로 알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열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맛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것, 감각적인 것, 기분적인 것과 같은 직관적으로 아는 모든 앎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렇듯 본질직관을 결여한 직접적 지식은 결코 가능할 수 없다.
7. 직접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의 정초 관계
본질직관은 단지 직접적 지식의 가능 조건이기만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 지식이 명제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지식의 한 유형이게끔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본질직관을 통해 범주를 구분을 하고 직관적 이해를 이론적 지식에서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지적인 지식은 대상의 범주를 구분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우리는 본질직관을 통해서 대상과 대상이 아닌 것, 대상의 의미와 이것이 적용될 수 있는 다른 대상 및 사태를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아이의 수준에서도 젖병과 젖병이 아닌 것, 젖병의 본질과 이것이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젖병을 파악한다. 명제적인 지식을 전혀 갖지 않고서도 범주에 따른 대상의 구획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구획이 비단 갓난아이에게서만 드러나는 현상인가? 그렇지 않다. 고도의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는 과학자 집단에서도 본질직관은 극적으로 발현되고 있다. 과학자들의 영감과 과학사에 있어서 패러다임 전환이 일종 본질직관이 작용한 사례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면서 밀도 측정법을 발견하게 된 일화나, 비록 허구라고 밝혀졌지만 뉴튼이 사과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떠올렸다는 일화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론에서의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로의 전환은 과학자 역시 본질을 꿰뚫는 직관적인 사유를 부단히 수행하고 있고 이러한 태도변경을 통해 놀라운 지적인 이해를 증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분명 이런 일들은 이론적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인데, 이는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직관적인 생각이 비명제적인 특징을 띠기 때문이다. 오히려 직관적 사유를 언어로 표현한 것이 명제적 지식이고, 이것이 이론적 지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특정 이론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은 특정 이론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특정 이론에 대한 명시적이고 명제적인 이해가 반드시 전제돼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적 사유가 언어와 이론을 분석적으로 탐구한다고 해서 도출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 둘은 연속성을 지니면서도 구분된다. 이처럼 본질직관을 통해 창출하는 직접적 지식의 풍성함은 명제적 지식과 그 구조만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이론적인 지식의 확장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정당화 문제에서 발생하는 빈틈에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이는 직접적 지식 그 자체가 스스로 정당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본질직관은 우리 인식의 시작과 근원에서부터 이론적 지식에까지 지속적으로 작용하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 지식 역시 인식론의 정당화 문제에서 결코 배제될 수 없는,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할 지식의 한 유형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8. 맺음말
필자는 지금까지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그리고 직접적 지식의 정초 관계와 정당화 문제에서의 의의를 살펴보며 명제적 지식만을 통한 인식의 정당성 확보가 불가능함을 논증했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명제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그리고 직접적 지식은 긴밀하게 연결돼있다.
②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은 명제적 지식에 우선하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③ 명제적 지식을 통해서만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 또한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지식의 유형이다.
④ 명제적 지식의 많은 내용은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의 언어적 표현(술어화)이다.
⑤ 명제적 지식의 도출과 정당화는 상당부분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에 근거한다.
➅ 이론적 지식의 도출과 정당화는 상당부분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에 근거한다.
위의 주장들이 타당하다면 지금까지의 인식론의 작업은 굉장히 소박한 인식적 정당화 작업에 그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다. 그렇다면 왜 전통 인식론에서는 명제적 지식, 그리고 명제적 지식으로 구성되는 이론적 지식만을 정당화 문제에서 다루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는 인식론이 영미분석철학 전통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존의 인식론이 명제적 지식만을 취급하는 이유가 논리실증주의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는 검증 가능한 진술만을 유의미한 기술로 간주하는데, 마찬가지로 인식론에서도 세계에 대한 지적인 이해가 오직 명제적 진술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명제적 지식에 비해 실천적인 지식과 직접적 지식은 주관적이고 명료하지 않으며 검증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정당화 논의의 시작에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물론 실천적 지식과 직접적 지식이 그 성격상 정당성을 확보한 믿음의 체계를 엄밀하게 쌓으려는 작업에서 쉽게 사용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명제적 지식만을 정당화 문제의 기초로 삼는 것은 자연주의적인 태도의 다름이 아니고, 기껏해야 이론에 한정적인 정당화 구조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검증 가능한 진술로서 명제적 지식만을 취급하는 것은 우리로 자연스럽게 이론적인 태도를 취하도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명제적 지식만을 취급하겠다는 입장은 곧 술어화될 수 있는 설명만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겠다는 말과 같은데, 데이비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사건에 대한 인과적 설명은 언제나 이론적이고 법칙적이기 때문에 인식론은 최초의 시도로부터 이론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당화 이론을 제시하는 토대론과 정합론은 언어적이고 법칙적인 이론적인 설명에 대한 믿음들 간의 관계에 제한적인 정당성만을 논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기초 믿음이니 믿음들의 유관성이니 하는 내용을 삼는 구조적 작업은 결국 우리의 실질적인 인식과는 동떨어진 실용적이지도 그렇다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인식론적 담론 안에서도 큰 기여를 하지 못하는 시도로 남게 된다.
사실 이러한 작업은 20세기 초중반 형식주의자들이 일상의 언어를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틀에서 포섭하려는 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체론(individualism)적인 견해에 입각한 그들의 야심찬 포부는 오늘날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현대적인 논의에서는 언어와 문화 그리고 심리를 분석하는데 전체론(holism)적이거나 맥락주의(contextualism)적인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식론은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과 전제에 있어서 논리실증주의적인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세계를 포함하면서 우리의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떠한 방식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이 인식론에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기존의 관점, 곧 세계에 대한 지적인 이해는 명제적 지식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여기는 영미철학 전통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도무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인식론인 것인지, 이론적 지식만을 위한 인식론이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인식론의 주체가 일상을 살아가는 인격체로서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는 이미 자명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망각한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이제는 인식론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세계를 기초로 하고 지식의 세 유형을 종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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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말
부족함이 많은 글이 당선작으로 선발돼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더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교수님들이 계십니다. 먼저 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계기를 제공해주신 백도형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교수님께서는 지난 4학기 동안 학부생인 제가 교수님께서 진행하시는 대학원 과목을 수강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심리철학, 과학철학, 인식론에 대하여 공부할 수 있었고 언어적 전회와 전체론의 의의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심리철학에 관심이 있었던 저에게 유익이 되는 조언과 가르침을 주셔서 길을 잃지 않고 공부해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박준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덕분에 1학년 때부터 메를로-퐁티의 사유를 접할 수 있었고, 과학기술 사회에서의 몸의 느낌의 중요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쁘신 와중에도 부족함 없이 진로와 행정에 대한 상담을 해주시고 여러 유익이 되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장미성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적극적으로 학습을 독려해주시고 진로에 관심을 가져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소박한 글이나마 쓸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신호재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에는 교수님께 배운 현상학적 문제의식이 많이 반영돼있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현상학에 흥미롭게 입문할 수 있었고 기존의 관심사를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패러다임 전환과 같은 관점의 변화를 갖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이 영향력은 미디어 기술을 공부하는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무엇보다도 교수님과의 지난 스터디를 통해 많은 성장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