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부문 당선작
여행용 캐리어가 되는 법
이가인(영화예술·19)
어디든 떠나고 싶은 날에는
모르는 이의 손을 잡고 순순히 따라 나선다
피해야 할 것과 올라타야 할 것을
소리로 구분할 수 있다
기다랗게 이어지는 굉음을 목에 두르고
정거장을 지나치는 열차처럼
지퍼를 물고 놓지 않을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집을 피워도 된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손을 풍경이라고 할 수 있나
그것이 나의 여행지라고 하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퀴는 어디든 있다
때로는 여행자가 잠든 사이
몰래 도로를 질주하며 스스로 달리는 법을 익힌다
기차의 속력과는 다른 여행자의 속력
나무만큼은 아니지만
새들의 정거장이 되어주기
돌아오는 길에는 바닥의 질감을 기억해둔다
고집스럽게 어제를 물고 놔주지 않을 것
많은 밤을 담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가지기
못 이기는 척 여행자의 손을 맞잡고 끌려가되
계단 앞에서는 아이처럼 안겨 어리광피우기
어젯밤 구겨둔 기차표를 삼키고
팔을 위로 곧게 뻗어 손을 잡지
벌 서는 자세의 자유로움으로
|시 부문 심사평
올해 다형문학상의 시부문의 응모작은 그 편수가 많지 않았지만 최근 몇 년에 비하면 고른 수준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의 작품을 읽으며 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낭만적 감상, 초월적 세계에 대한 지향 그리고 현실의 문제들이 다양한 시적 주체의 얼굴로 형상화 되어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당선작으로 이가인(영화예술전공 3학년)의 「여행 캐리어가 되는 법」을 선정하였다. 그가 펼쳐 놓은 사물을 통한 관념적 사유는 놀라울 정도의 탄력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가인의 문체는 일상적 어법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 고인 시적 사유는 범상치 않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손을 풍경이라고 할 수 있나”와 같은 평범한 듯 보이는 고백은 시적 대상과 조응하는 주변 세계의 미묘한 감각을 담아내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또한 “기차의 속력과는 다른 여행자의 속력”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시가 지향하는 지점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으며 시적으로 더 멀리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가작으로 손희서(문예창작전공 4학년)의 가위바위보하나빼기일」을 선하였다. 손희서의 작품은 긴 호흡의 문장을 흐트러짐 없이 구사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어른”, “아이들”, “선생님”이라는 등장인물들은 일상적으로 그것들이 가지는 기호의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있다. 기의에 어긋난 기표들의 행위는 충격적으로 부조리한 세계의 단면을 예리하게 드러내준다. 본격적인 풍자성이 더해진다면 새로운 시적 세계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된다.
당선이 되지는 않았지만 시적 가능성이 있는 작품들도 많았다. 무심한 듯 내뱉는 발화 속에 생의 진실을 담으려는 김서혜(문예창작전공 2학년)의 작품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반지호(국어국문학과 3학년)의 작품에도 끝까지 눈이 갔다. 그리고 임건우(국어국문학과 4학년)의 단정한 문법, 이지우(국어국문학과 2학년)의 육체적 언어와 관념이 뒤섞인 작품에서도 가능성이 엿보였다. 손도영(국어국문학과 4학년)의 긴 호흡은 눈길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좀더 구제적인 현실과 매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는 것도 밝혀둔다.
당선자들에게 축하를 드린다.
엄경희(국어국문학과)
우대식(문예창작전공학과)
|시 부문 수상소감
문학은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이 하는 것이라던 말을 기억합니다. 최근 들어 가장 슬펐던 순간은 좋아서 시작한 일이 의무처럼 느껴질 때였습니다. 즐거움보다 부담감이 커지는 순간 그 일을 할 때의 자유로움은 사라지고 텅 빈 의무감만 남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계속해서 어딘가로 나아가야 한다면, 오로지 목적지로 향하기 위한 여행보다는 목적지가 멀어 보이지 않더라도 가는 길에 뜻밖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용기로, 계속해서 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