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당선작
곰과 아버지
한의진(문예창작·18)
해수는 준희에게 리모컨을 넘겨주었다.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뉴스에서는 지겹고 어두운 이야기만 나왔다. 해수는 유튜브에서 볼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먹방, 고양이, 게임, 자극적인 썰 전부 해수의 흥미를 끌었다. 썸네일만 봐도 재밌어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준희가 의아하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기 전까지 해수의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준희가 채널을 돌리다가 정착한 프로그램에서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 연예인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2분 정도 산을 오르는 모습과 얼마나 깊고 인적이 드문 산속인지를 강조하는 장면이 나왔다. 연예인은 숨을 몰아쉬었다. 도착한 곳에서는 허술하게 지어진 나무집이 보였다. 옆으로 작지않은 텃밭도 가꿔져 있었다. 해수는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준희가 다시 한 번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비비기도 했다. 그리고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깜짝 놀라며 해수를 불렀다. 아, 왜? 해수도 덩달아 놀라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너희 아빠. 해수는 준희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나온 것을 아주 오랜만에 들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방송에 나온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지저분하고 마른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 남편일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8년 만에 석수의 행방을 알게 됐다.
해수가 기억하는 아버지, 석수는 키가 180이 넘었고 몸무게도 세 자리 수를 찍는 거구의 남자였다. 덩치가 크긴 했지만 살이 쪄보이진 않았다. 워낙 뼈대가 굵고 근육이 많은 몸이었다. 20대까지 씨름 유망주로 불리며 도 대회에서 곧잘 메달을 따와 가족들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자는 볼이 움푹 들어가 있을 정도로 말랐고, 유난히 두꺼웠던 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몇 년은 자르지 않은 듯한 머리카락과 수염 때문에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서글서글한 인상만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입과 눈 주위로 깊게 파인 주름이 그것을 강조해주었다. 그냥 닮은 사람이겠지. 해수는 준희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해수의 눈에는 사실 닮아보이지도 않았다. 12살에 집을 나간 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지만, 기억 속 석수와 화면 속 석수는 너무 달랐다. 해수가 상상하던 석수와도 전혀 딴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석수는 마카오 어느 빌라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거나, 부산이나 남해에서 다른 여자와 순탄하지만은 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속 남자의 얼굴 아래로 뜨는 ‘김석수 / (57세)’라는 자막에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석수는 연예인에게 자신의 집을 소개시켜주었다.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흙을 발라 만든 집이었다. 아궁이와 나무 밑둥으로 만든 나름의 주방이 있었고 잠은 침낭에서 잔다고 했다. 땅을 파고 그 위에 널빤지 같은 걸로 디딤대를 만든 것이 화장실었다. 석수와 연예인은 저녁으로 먹을 음식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저건 도라지, 저건 하수오라며 연예인을 가르쳐주는 석수를 보며 준희는 의아해했다. 자신과 함께 살던 석수는 생전 나물이나 버섯, 약초 같은 것에 지식이 없었을 뿐더러, 간단한 찌개 하나 끓일 수 있는 게 없을 정도로 요리에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화면 속 석수는 독이 없는 버섯을 골라낼 수 있었고, 냉이를 섞어서 냄비에 밥을 할 수도 있었다. 계곡에 미리 던져둔 통발에서 고기를 건져 매운탕도 끓였다. 참기름과 간장으로 만든 장을 넣어 비빈 밥을 크게 떠서 한입에 먹는 연예인을 보자 그들의 입에도 침이 고였다.
해수는 주방으로 가 딸기를 씻었다. 준희에게 포크를 건넸다. 이제 반팔을 입을 정도로 날이 풀렸는데 아직까지 딸기가 나왔다. 가격은 더 비싸졌지만 맛이 좋았다. 석수도 봄이 되어 먹을 것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런데 봄이 되면 곰이 나오진 않나요?
곰이라뇨.
모르셨어요? 반달곰이 엄청 퍼졌다던데.
카메라는 석수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곰에 대해 처음 들은 것 같은 멍청한 표정이었다. 개체수 복원을 위해 퍼트린 반달곰 부부가 번식해 사람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뉴스를 해수도 본 적 있었다. 연예인은 크게 웃었다. 석수도 잠깐 눈치를 보다 따라 웃었다. 얼마나 큰 곰이 나오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시름 선수였거든요. 석수가 근육을 과시하듯 팔을 들어올려 보였다. 팔이 너무 야위어있어 더 우수꽝스러웠다. 해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입에 있던 딸기 조각이 조금 튀었다. 미친 새끼. 준희가 낮에 읊조리는 소리에 해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준희의 말을 조용히 발음해보기도 했다. 미친 새끼.
해수는 준희가 욕을 하는 것을 종종 들어왔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해수의 기억으로는 석수가 집을 나가기 전까지 준희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석수가 집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따금 욕을 뱉었다.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욕이 아닌 누군가 적어준 대본을 읽는 사람처럼 어색했다. 시발 놈. 미친 놈. 나가 죽어. 밥을 하다가도 빨래를 개다가도 마치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기억해낸 사람처럼 조급하게 욕을 읊조렸다. 해수는 그런 것을 들을 때마다 뭔지 모를 죄책감을 마음속에 한 겹 쌓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해수는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누구의 잘못일까? 잘못은 김 석수 그 새끼에게 있었다. 해수가 대학에 떨어진 것도 남들 다 다니는 학원을 보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니 석수의 잘못이었다. 준희가 주말에도 못 쉬고 부업을 해야 했던 것도, 종종 헤어 나올 수 없는 외로움이 그들을 덮쳤던 것도. 그 모든 불행은 석수가 빚을 잔뜩 지고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해수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16살 때였다. 그 중대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 해수의 마음에 응어리져있던 죄책감은 한순간에 분노와 경멸로 바뀌었다. 그것은 20살이 된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석수가 도 대회에서 메달을 땄을 때의 사진이 나왔다. ‘듬직한 씨름선수이자 한 가정의 아버지였던 석수 씨’라는 자막과 함께 셋이 함께 찍은 사진도 자료로 등장했다. 사진 속에서는 비대한 몸집의 석수와 단발머리인 준희가 연못 앞에 서 있었다. 햇빛이 사나운지 준희의 품에 안긴 해수까지 잔뜩 구긴 표정이었다. 화질이 좋지 않아도 그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젊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해수는 지금의 준희가 저때보다 더 건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준희는 사진을 찍었던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꽃을 봤다. 호수에 핀 연꽃을 스친 바람이 준희와 해수의 머리칼을 흐트리고 지나가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석수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했다. 산책 중이던 중년의 부부가 하나, 둘, 셋 외친 뒤 찍어준 두 장의 사진 중 하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화로웠지만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석수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막무가내를 피워 모처럼의 나들이가 허무하게 끊겨버렸다. 하지만 준희는 그날을 평소보다 행복했던 날로 기억했다. 인화되어 액자에 들어있던 사진이 사라진 걸 발견했을 때 준희는 석수가 완전히 집을 나갔음을 눈치 챘다. 달랑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 잠시 외출하듯이 나갔다가 열흘이나 보름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그 전까지의 가출과는 조금 달랐다. 준희는 하필 그 사진을 가져갔다는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의 행복한 순간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준희는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딸기가 너무 무르다. 그러면서 트름을 한 번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해수는 그녀가 침대에 눕는 소리를 듣고 다시 텔레비전을 켠 뒤 소리를 최대한 줄였다. 남은 딸기도 먹었다. 텔레비전 속 그들도 밥을 다 먹고 어두워진 숲속에서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방송용 조명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연예인이 질문하면 석수가 대답했다. 연예인은 흥미롭다는 듯 반응했고 농담을 던지기도 하며 온화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산으로 오신 계기는 뭔가요? 석수는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해수는 그 생각 중에 자신들이 있을지 궁금했다. 석수는 자신이 씨름 선수였음을 다시 언급했다. 그는 연습 중 발목과 허리에 부상을 입었고 다시는 씨름을 할 수 없게 됐다. 코치 일을 제안 받았지만 거절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던 그는 사업에 손을 댔고 빌린 돈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망해버렸다. 그러다 도망치듯 집을 나갔는데 그 이야기가 방송에 다 나오진 않았다. 석수는 그저 부상 이후 방황하다가 산으로 왔습니다, 그렇게만 말했다.
산에 계시다보면 외로울 때도 있으시죠? 가족들 생각도 하고 그러세요? 연예인이 질문하자 석수는 아까보다 짧게 생각하고 대답했다.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해수는 석수의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해 기억하는 게 없었다. 그는 해수가 태어나기도 전 준희의 뱃속에 있을 때 죽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그도 마찬가지로 키가 컸고 눈은 쳐져있었지만 눈썹은 치켜 올라가 있어 고집 있어 보였다. 석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보냈다고 했다. 만주에서는 곰을 사육해 타고 다니기도 하고 옥수수도 따게 하고 짐도 옮기게 했는데, 자신도 아버지에게 곰처럼 키워졌다고. 그 말을 하며 곰과 만나면 반갑다고 악수라도 해야겠다고 허허 웃었다.
해수는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사람처럼 주먹을 쥐었다가 손톱을 매만졌다가 했다. 그녀는 석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예인이 석수의 말에 웃기다는 듯이 낄낄거리고 있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 장면은 해수가 살면서 매체에서 접한 어떤 것보다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연예인은 석수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작별인사를 한 뒤 산을 내려왔다. 기회가 되면 언제 한 번 다시 방문하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끝으로 방송이 종료됐다.
해수는 텔레비전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옆에서는 준희가 코를 골고 있었지만 해수는 그녀가 자는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 그 사람 돌아오면 어쩌지? 난 왠지 돌아올 거 같아. 산에 곰이 사는 걸 이제 알았다잖아. 곰이 산다는데 어떻게 산에서 살고 배겨? 무서워서 내려오면 갈 데가 여기 밖에 더 있겠어. 해수는 마음속으로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날 이후 해수는 석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떤 말을 해야 그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을까.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준희에게 티 내지는 않았다. 준희가 어떻게 그를 맞이할지, 맞이하기는 할지 또한 알 수 없었다. 해수는 그녀가 대놓고 석수를 무시하거나 이혼 서류를 들고 올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석수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주거나 어깨를 주물러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해수는 석수가 집을 나가기 전부터 이미 준희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준희가 자신의 손을 씻겨줄 때,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을 때도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있을 때, 심지어는 손들고 서 있으라며 벌을 줄 때도 사랑을 느꼈다. 준희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걷는다는 것을 해수는 알고 있었다. 준희와 석수가 손을 잡고 있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아주 예전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만 없는 사람처럼 석수와 함께 사는 준희를 보며 해수는 자주 헷갈려했다. 해수가 보기에 준희는 줄 수 있는 사랑의 총량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석수에게 가 있던 사랑까지 모두 끌어 모아 자신에게로 향해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준희는 자신 때문에 석수를 다시 받아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해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음날에도 그들은 석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준희는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인터벌 러닝을 하고 왔고 해수는 오늘 돌려야 할 전단지 장수를 세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차린 지 3년째인 체육관은 이제 막 체계를 갖춰나간다 싶었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며 있던 수강생들도 다 빠져나갔다. 결국 수강료를 반이나 줄이는 결단을 내린 준희는 해수에게 광고 전단지를 나눠주라고 시켰다. 해수도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준희가 처음부터 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석수가 집을 나간 뒤 대부분 운동선수인 그의 친구들이 준희의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줬다. 그들의 체육관에서 일하다보니 결국 4년 만에 교육 자격증을 따게 됐다. 해수가 보기에도 그건 기적에 가까웠다. 누가 봐도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게 티가 날 정도로 위협적인 이두와 삼두, 두꺼운 대흉근과 허벅지를 가지게 된 그녀는 해수에게도 운동을 권했다. 어차피 공부엔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 체육관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자주 했다. 아빠를 닮아서 조금만 하면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해수는 실제로 키가 컸고 남들보다 쉽게 근육이 생겼으며 운동신경이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몸에 있는 피를 모두 빼내어 새로 갈아 채우고 싶었다. 운동도 큰 키도 싫었고 준희가 체육관을 운영하는 것도 싫었다. 석수와 관련된 것은 모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준희는 자신이 제일 행복했던 시절의 상징이라며 석수가 씨름으로 잘 나갈 때 땄던 메달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해수와 준희는 종종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럴 때면 침묵했다.
희찬은 해수가 아버지를 찾았다고 하자 어디서 어떻게 찾았냐며 쉬지 않고 물었다. 희찬의 아버지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지 1년이 조금 넘은 상태였다. 해수는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며 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뚝배기 파스타는 그들이 중학생 때부터 종종 가던 곳이었다. 맛있어서라기 보단 저렴한 값에 대학생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 대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러 오는 곳을 그들은 방과후에 오곤 했다. 꽤 오랫동안 대학로에서 장사를 한 것 같지만 그렇게 촌스럽지는 않은 모노톤의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다. 부모님끼리 친해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자란 그들은 남녀가 붙어있기만 하면 연인 사이로 몰아가는 친구들을 피해 중학교와 조금 떨어진 뚝배기 파스타로 자주 왔다. 그때만 해도 해수는 그런 희찬이 정말로 뚝배기 파스타 앞에 있는 대학교의 학생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파스타를 다 먹으면 희찬은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들을 것이고 해수는 역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줄 계획이었다.
너네 아버진 왜 하필 산으로 간 걸까.
갈 데가 거기밖에 없었겠지.
그래도 살아계셔서 다행이다.
해수는 잠깐 뜸들이다가 그러게, 하고 대답하고 다시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그녀는 희찬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희찬의 아버지 H는 키가 작고 조용했다. 그의 조용한 성격은 집에서 자주 무시당했지만 직업적으로는 쓸모 있었다. 택시를 운전할 때 H는 꼭 필요한 말만 했고 개인적인 자식 자랑, 정치적 견해, 쓸데없는 정보들은 입이 근질거려도 말 하지 않았다. 그것은 손님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H는 거절을 힘들어했다. 돈이 부족하다는 손님이 조금만 더 가주실수 있냐고 부탁할 때도 다 들어주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매달 빠져나가는 보험료만 해도 월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돈을 빌려 가놓고 갚지 않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그 친구 중에는 물론 석수도 포함이었다. H에게 돈을 빌린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적었지만 액수만 놓고 보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는 믿었던 석수에게도 돈을 뜯긴 후 더욱 말이 없어졌다. 희찬은 해수에게 그런 아버지 욕을 자주 했다. 우리 아빠는 어디서 뒤졌을 거야. 그러나 해수는 희찬의 그런 말 속에도 아버지에 대한 묘한 걱정이 묻어 있다는 걸 알았다.
먼저 식사를 끝낸 희찬은 석수가 나온 방송을 찾아보았다. 캡쳐 되어 인터넷에 올라온 그는 정말 몰라보게 달라져있었다. 야, 근데 뭔가 이상한데? 희찬의 말에 해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보여준 화면에 적힌 방송일자는 2020년 4월. 어제 해수가 보았던 방송은 작년 봄의 방영된 것의 재방송이었다.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구나. 해수는 레몬을 띄워 신맛이 강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은 간단하다. 막 역사에서 빠져나와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앞으로 손을 뻗어 한 장씩 쥐어주면 끝이다. 해수는 자신을 무시하고 피해가거나 전단지를 받자마자 버리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았다. 자신 또한 길에서 나눠주는 광고지를 굳이 받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버려지는 것들보다는 누군가가 받아간 전단지가 자신의 손을 떠난 이후의 여정을 자주 떠올렸다. 가방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의 집 안까지 침투하게 될 그 전단지. 거실 탁자에 무심하게 올려질 그것은 누군가가 무의식적으로 운동이나 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 전단지는 자신의 숙명을 다 한 것이고 이제는 버려지거나 찢어지거나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전단지 또한 자신이 자랑스러울 것이고 그러면 된 것이다. 실패한 채 버려지는 전단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게 해수의 규칙이었다. 그녀가 석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 또한 같은 의미였다. 하지만 생각이란 게 사람의 마음대로 조절되는 종류의 무엇은 아니었다.
왜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걸까. 그녀는 중년의 남자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생각했다. 혹시 내려왔는데 집이 어딘지 까먹은 건 아닐까. 40대의 직장인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면서도 생각했다. 산에 사는 게 너무 익숙해진 걸까. 소심해 보이는 남학생에게 전단지를 나눠줄 때도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아니면 이미 곰에게 잡아먹힌 건가. 그녀는 키가 크고 마른 50대 후반의 남자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생각했다. 그는 해수가 건네는 전단지를 받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갈 길을 갔다. 해수는 방금 지나친 남자가 석수와 소름끼치게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떠난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꽤 멀리 걸어간 남자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남자는 계속해서 인파 속으로 걸어가고 해수는 사람들을 헤치며 그를 뒤쫓았다. 몇 분 동안 뛰고 밀치며 확인한 남자의 얼굴은 석수와 전혀 다르게 생겨있었다. 닮은 거라곤 조금 허름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해수는 남자에게 황급히 사과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날이 흐려져 있었다. 일기예보에서 비는 내일부터 온다고 했는데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비가 오는 날엔 전단지를 돌리지 않는다. 이미 역에서도 많이 떨어진 곳까지 와버렸다. 해수는 전단지를 가방에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석수를 떠올리지 않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해수는 직접 그를 만나야만 결단이 내려질 거라 생각했다.
인터넷을 뒤지자 어렵지 않게 석수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위치는 지리산.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산을 오르면서도 해수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석수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 지조차도 결정하지 못한 채였다. 왜 우리를 버렸냐고 따질까? 모르는 사람인 척 접근해서 물어볼까? 뭐를 물어보지? 해수는 사실 석수에 대해 궁금한 게 없었다. 그가 왜 산으로 온 건지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건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산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쯤 산을 탔을까.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해수는 금방 지쳐 돌부리에 걸터앉았다가 다시 산을 타길 반복했다. 인터넷에서 본 정보에 따르면 석수가 있는 곳은 등산로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문 등산로라 가끔 사람을 마주치면 반가울 지경이었다. 석수는 어쩌다가 이런 산으로 올라온 걸까. 혹시 죽으러 온 건가. 나뭇가지에 목이라도 매려고? 풀숲을 헤치며 해수는 걸었다. 풀과 나뭇가지에 긁혀 온몸에 상처가 났다. 사람이 없는 길을 걷자 연예인의 말도 떠올랐다. 산에 반달곰이 많이 퍼졌다던데. 인위적으로 풀었던 아기 반달곰이 괴물 같은 속도로 자라 내 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나는 거의 목숨을 걸고 아버지를 찾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그가 죽으러 이곳에 왔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고통을 겪고 있는 거 아닐까. 해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석수에 대한 생각 또한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길도 없는 숲속을 1시간 정도 더 헤매고, 해가 이미 어둑해져 그만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그녀의 눈앞에 고물 같은 집이 나타났다.
집은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보다 조금 더 커보였고 낡아보였다. 집이라기 보단 나무와 흙으로 빚은 동굴 같았다. 한 평정도 되는 텃밭에는 가지와 고추, 상추가 자라고 있었다. 해수는 텃밭을 지나쳐 집 입구에 덮여있는 천막을 들어올렸다. 내부엔 나무로 만든 책상이 있을 정도로 나름 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사람은 없었지만 최근까지도 누군가 있었던 흔적이 보였다. 해수는 밖으로 나와 바위 앞에 놓인 나무 밑동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 석수가 식탁과 의자로 쓰던 곳이었다.
곧 해가 완전히 저물 것 같았다. 해수는 핸드폰 프레쉬를 밝히려다 남은 배터리가 얼마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포기했다. 준희에게 전단지는 다 돌렸냐는 문자가 와 있었다. 해수가 그 말에 답장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핸드폰은 완전히 꺼져버렸다. 뒤쪽 수풀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 쪽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해수의 목에 소름이 끼쳤다. 주위엔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녀를 구해주거나 목격자가 되어줄 사람도 없었다. 발걸음이 점점 자신을 향해 오자 해수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두껍고 뜨거운 것이 해수의 어깨 위로 올라오자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해수의 어깨에 얹어진 손의 주인공은 H였다. 그녀는 H의 허름한 몰골 때문에 한 번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텔레비전에서 석수를 처음 봤을 때처럼 아무렇게나 자른 듯 머리카락이 지저분했고 수염은 덥수룩했으며 깨진 안경을 끼고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 풍기는 악취와 땀 냄새가 섞여서 났다. 해수는 자신을 덮친 괴한이 수찬의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고는 놀라움과 안도가 동시에 들었다. 반면 H는 해수의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해수가 이곳에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덤덤했다.
저녁은?
H의 한 쪽 손에 들린 바가지엔 다슬기가 가득했다. 아직 먹지 않았다는 해수의 대답을 듣곤 그녀를 지나쳐 가스통으로 만든 화로대로 갔다. 종이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미리 넣어둔 장작 사이에 쑤셔 바람을 불어넣으니 얼마 안 있어 불이 피어올랐다.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워진 주변이 밝아졌다. H는 끓는 물에 다슬기를 넣었다. 비리고 따뜻한 냄새가 순식간에 퍼졌다. H의 안경에 김이 잔뜩 서려 앞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H와 해수는 바늘로 삶아진 다슬기 속살을 돌돌 돌려 껍질에서 빼냈다.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는 해수의 말에도, 왜 이곳에 있냐는 물음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 삶아진 다슬기를 찬물에서 한 김 식힌 뒤 해수의 손에 바늘을 쥐어줄 뿐이었다.
아직 까야할 양이 남아있었지만 H는 어느 정도 깐 다슬기의 양이 늘어나자 요리를 시작했다. 냄비에 배추와 다슬기, 청양고추, 된장, 간장, 마늘 세 톨을 한 번에 넣고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이젠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들은 끓는 냄비 앞에 앉아 꽤 오랫동안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고 있었다.
H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삶을 늘어놓았다. 엄격하고 과묵했던 아버지와 더 무서웠던 형들, 결혼과 출산, 수세미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 하다가 택시운전사를 시작하게 된 것. 해수는 그중에서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제일 흥미로웠다. H는 마치 버튼을 눌러 불을 켰다가 끄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순식간에 지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형들의 눈을 피해 다니다가 알게 된 능력이었다. 그 능력을 이용하면 택시 운전을 할 때도 편했고 아내가 잔소리를 할 때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해수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능력이 H가 떼먹힌 돈을 되찾아주진 못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신세한탄을 들을 때마다 H는 언젠가 잃어버린 돈을 모두 되찾겠다는 꿈을 꾸었다. 8년 전 H에게 200만원을 빌린 뒤 가족까지 버리고 도망쳐버린 석수를 텔레비전에서 발견했을 때 H는 곧장 그를 찾아 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석수는 그곳에 없었다. H는 석수가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며 일주일을 이곳에서 버텼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산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돈도 되찾지 못한 채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기 미안해진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계속 산에서 살게 됐다. 이 모든 이야기는 다슬기국이 완성되는 17분 만에 끝났다. 해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H가 주는 밥과 국을 먹었다. 국에서는 조금 쓴맛이 났다.
밤이 너무 늦어 해수는 산 속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H는 침낭을 가지고 밖에서 자겠다고 했다. 해수는 맨바닥에서 이불도 없이 자는 것이 걱정됐지만 날이 춥지 않아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산에서 내려가면 희찬에게 이 사실을 얘기해 줘야지. 그럼 희찬은 아마 이곳으로 와 아버지에게 내려오라고 설득하겠지. 그 새끼도 어지간한 또라이네. 엄마는 아마 그렇게 말하겠지. 해수는 밤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자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고 있었다. 눈으로 H가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침낭만 비에 젖고 있을 뿐 그는 없었다. 어딘가로 비를 피하러 간 것이라 생각했던 H는 해수가 하루 종일 내리는 비 때문에 산을 내려가지 못하고 저녁까지 있는 동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던 H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해수는 H가 존재감을 없애는 능력을 쓴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자 그가 없는데도 옆에 있는 기분이 들어 안도감과 섬뜩함이 동시에 들었다.
해수는 그날 조금 남아있던 밥과 김치로 하루를 버텼다. 핸드폰도 켜지지 않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종일 잠을 잤다. 눈을 뜨면 비가 오고 있었고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땐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고 오로지 해수 자신뿐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독이었다. 그녀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다음날 해수는 질퍽해진 흙을 밟으며 집 주위를 탐험해보기 시작했다. 비 때문에 강물이 불어 더 뚜렷하게 들리는 물소리를 따라가자 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H가 미리 던져두었던 통발에 작은 메기가 잡혀있었다. 해수는 바가지에 메기를 넣고 숨을 쉴 수 있도록 강물을 넣어주었다. 부추와 상추 조금과 애호박 하나도 땄다.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위 식탁 위에서 펄럭이는 메기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다른 손에는 과도를 들었다. 해수는 한 번도 물고기를 직접 죽여본 적이 없었다. 눈 딱 감고 내리치기 위해 칼을 머리 높이 까지 들었지만 결국 그대로 내려놓고 말았다. 산 채로 넣고 삶아볼까 했지만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메기는 다시 바가지 속으로 넣었다. 결국 그녀는 그날 밥과 기름에 볶은 애호박만 먹었다. 해수는 메기가 스스로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숨을 거두자마자 먹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틀이 지나자 메기는 힘이 없는지 지느러미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이 약해져 민달팽이를 잡아 메기에게 먹였다. 그래도 메기가 활력을 되찾지는 않았다.
산에 도착한 지 5일이 됐을 때 해수는 곰을 봤다. 산딸기와 오디를 따다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멧돼지인 줄 알고 겁을 먹었다가 그 뒤엔 H인가 하며 안심했다. 그러나 슬쩍 보이는 거대한 갈색 몸뚱이에 온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곰은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언뜻 보면 사람처럼 보이는 그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한참을 가만히 기다리자 곰은 해수를 보지 못했는지 그대로 멀어졌다. 그러고 집으로 와보니 해수의 가방에 있던 전단지가 몇 장 사라져있었다. 여차하면 땔감으로 쓸 생각이었기에 미리 장수를 세어놨는데 30장 넘게 남아있던 전단지가 9장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해수는 집 밖으로 나가 누군가 근처에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여전히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전단지 21장의 행방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해수는 메기가 든 바가지를 들고 다시 강으로 갔다. 출렁이는 물살을 따라 메기는 힘없이 흔들렸다. 이제 보니 물이 조금 흐려진 것 같기도 했다. 바가지를 기울여 메기를 강으로 돌려보냈다. 도망가지도 않고 잠깐 그 자리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천천히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강물을 느끼는가 싶더니 조금씩 활기가 도는지 빠르게 깊은 곳으로 도망쳤다. 해수는 메기가 사라진 곳을 잠시 지켜봤다. 햇살이 비쳐 반짝이는 부분이었다. 다시 산 속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방에서 전단지 한 장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날아가지 않도록 돌도 하나 얹어두었다. 누군가 이 전단지를 보고 다시 운동이나 시작해볼까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으로 전단지에 대한 소명도 자신이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도 쓸모 있었던 것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보다 조심해서 한발 한발을 신중하게 짚고 내려와야 한다. 그게 힘들다면 곰처럼 네 발을 이용해도 좋다. 해수는 조금 길을 헤매긴 했지만 왔던 기억을 되짚으며 다시 익숙한 길을 찾아냈다.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를 거칠게 흔들며 바람을 만들어냈다. 울퉁불퉁한 길을 밟으며 해수의 시야 또한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해수는 자신이 산에 두고 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조금씩 보이는 산의 아랫부분을 향해 걸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올해 숭실문화상 소설 부문은 예년 보다 적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전공을 불문한 보다 많은 학생이 참여하는 문학 축제를 기대했으나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두 심사위원이 응모된 작품들을 읽고 우수 작품을 선별했다. 응모된 작품 수는 적었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었고, 소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동시대 청년들의 경향을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두 심사위원 모두 서사적 완성도와 독창성, 문장력 등을 중심으로 심사했다. 별다른 이견 없이 우수 작품에 대한 선별이 일치해서 어렵지 않게 가작과 당선작을 정할 수 있었다.
가작인 김수림 학생의 「잼과 대만 그리고」는 자신의 실명 대신 ‘잼’과 ‘대만’이라고 지칭되는 두 청년의 일상을 흥미롭게 그려 보이고 있다. ‘잼’은 일터인 ‘세계과자점’으로 출근하는 아침, 가로등에 목줄이 묶인 강아지를 발견한다. 묶인 강아지를 구할 수 없다는 자책감이 일상의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의 삶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는 계기를 만든다. 이후 사라진 강아지와 어딘가 묶여 있는 삶에 대한 동일시가 정서적 공감을 불러내고 있다. 일종의 취향의 공동체로서 묶여 있는 우정과 일상을 큰 진폭 없이 서술하고 있다. 다만 3인칭 초점 화자의 목소리가 1인칭의 목소리와 좀 더 분리되어 객관적 시선을 유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당선작인 「곰과 아버지」는 엄마와 딸이 우연히 방송에 나온 자연인 아버지의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8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 한때 씨름선수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그려 보이며 흥미로운 소설의 도입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뒤 체육관을 운영하는 엄마 준희와 딸 해수의 일상도 슬픔과 분노를 전면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대사와 행위로 재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문장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소설을 계속 따라가게 하는 힘을 느끼게 한다. 후반부, 지리산 자락에 숨어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해수의 뜻밖의 자연 생활은 건강한 삶의 투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삶에 맞서는 해수의 건강한 인간성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완성도 있는 구성과 결말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주저함 없이 위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리며 유쾌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수상자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응모해 준 학생들에게 용기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내년에는 학교의 전통 있는 문학상에 대한 홍보와 관심과 응모가 더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김태용 교수(문예창작전공)
김미진 교수(문예창작전공)
|소설 부문 수상소감
3년 전에 처음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이렇게도 고쳐보고 저렇게도 고쳐보았다가 한동안 폴더 구석에 박혀있던 소설이기도 했고요. 다시 소설을 꺼내보니 역시 부족한 점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나름 등장인물들과 정이 들어, 퇴고를 하면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숭실대에서 소설로 상을 받을 수 있어 기쁩니다. 계속해서 소설을 공부하고 써나가보라는 토닥임처럼 느껴져 감사했습니다. 소설을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 문학을 가르쳐주시고 용기를 주신 선생님들, 마지막으로 저에게 투고해보라고 제안해주었던 언니에게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