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논문상 당선작
메타버스(Metaverse) 세계-로의 감각의 열림
:에피쿠로스와 메를로 퐁티의 촉각이론을 중심으로
양은혜(철학·17)
들어가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만질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에피쿠로스의 감각 이론에서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촉각으로 환원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철학은 이러한 촉각적 경험을, 감각적 경험을 경시해 왔다. 현대의 과학적·의학적 연구들을 살펴보면 촉각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촉각의 감각기관인 피부는 생명 유지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며 촉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 없이는 살아갈 수 있으나 피부의 상당 부분을 잃을 경우에는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또한 촉각계는 우리 몸의 감각 기관 중 가장 먼저 발달하였으며 가장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렇듯 촉각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철학에서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본 논문에서는 철학적으로 촉각의 중요성을 규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촉각이 적용된 메타버스(metaverse)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해 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은 이데아(ἰδέα)를 인식하는 것은 이성임을 밝힌다. 이성을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으며 감각은 진리를 가리는 것으로 여겼다. 감각적 지각은 억견(δόξα)이며 참된 앎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감각의 불확실성과 감각이 때로 우리를 기만하는 것 때문에 감각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 감각이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는가? 감각기관에서 받아들여진 것들에 대해 우리의 이성이 멋대로 종합하여 나온 환영을 기만이라 칭하는 것은 아닌가? 서양 철학의 전통 내에서 플라톤으로부터 감각은 진리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고 합리성은 찬양받아왔다. 오직 우리의 이성만이 우리를 하나의 확고부동한, 명석 판명한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으로 칭송해왔으며, 그에 반해 감각은 불분명하고, 참된 진리로 이를 수 있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이는 감각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감각을 무엇인가로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에 고의로 감각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눈을 가리고 무시해 온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에피쿠로스는 감각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사물들의 원리(ἀρχή)를 밝히고자 했다. 에피쿠로스는 사물의 본성을 원자로 정의했으며,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감각적 경험들로써 이끌었다. 에피쿠로스가 취한 방법론은 감각 가능하며 경험 가능한 사례들을 통한 유비추론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을 서술한 루크레티우스의 저작『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사물들의 본성을 원자로 정의하고 그것은 너무 작기 때문에 감각들로 포착할 수 없지만. 그것이 원자라는 것을 지각함을 근거로 들어 유추를 통해 증명했다. 에피쿠로스는 감각의 오류 가능성을 배제했다. 감각 기관에 포착되어 들어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감각을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 추론의 근간으로 삼았다.
근대에 이르러 인식론은 철학의 화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 경험에 대한 신뢰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합리론은 이성을 중시하고 경험론은 감각 경험을 내세웠지만 이성에 의존했고 후에 버클리의 관념론으로 나아간다. 감각 중에서도 시각만을 중시했으며 모든 것은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고 관념의 다발로 변모하게 된다. 이후에 메를로-퐁티가 등장하여 지각은 즉 감각과 느낌은 참과 거짓의 판단 이전에 놓여있다고 하면서 다시금 감각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감각 경험이 천대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시 감각의 지위를 복권한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메를로-퐁티일 것이다. 그는 지각의 현상학, 몸의 현상학을 전개해 나가며 몸의 가치를, 감각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느낌의 촉각성 등을 설명하며 촉각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전개했다. 이 글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사유와 메를로-퐁티의 사유를 통해 감각의 가치와 중요성을 규명해 볼 것이다.
메를로-퐁티 이후 현대에는 메타버스(Metaverse)가 등장했다. 메타버스란 무엇인가? 메타버스란 가상세계라는 뜻이다. Metaverse의 meta는 무엇인가를 초월했다는 의미이며 verse는 우주와 세계를 뜻하는 universe에서 따온 말이다. 즉 유니버스(현실)을 초월한 가상 세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메타버스와 기존의 인터넷 사이의 차별점은 전자가 체화된 인터넷, 즉 몸을 지닌 인터넷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단지 보고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서 다르다. 매튜 볼(Matthew Ball)에 따르면 메타버스는 적어도 이와 같은 조건들을 충족한다. 물질세계와 가상현실을 연결하며, 공유되고 지속되는 인터넷 공간을 지닌다. 사용자의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며 다른 이들도 접속 가능하다. 경제적 거래가 이루어지고, 몸을 통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메타버스가 물질세계와 가상현실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필자는 메타버스가 물질세계와 가상현실의 사이-세계로서의 위상을 가진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현실과 가상이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 자체이자 사이-세계로서의 메타버스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메타버스 내의 감각의 재현, 이른바 실감기술을 필요로 할 것이다. 실감기술을 매개로 물리적 실재와 가상의 공간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가 바로 메타버스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메타버스 내의 감각의 재현을 통해 사이-세계로서의 메타버스 실현이다. 이미 많은 기술의 개발로 메타버스 내의 감각 실현이 가능해졌다. 본 논문에서는 무엇보다도 촉각이 메타버스에서 중요한 감각으로 자리 잡을 것을 주장할 것이다. 촉각은 주객비분리적 특성, 즉 쌍방향성과 현실감을 제공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그것을 본 논문을 통해 밝힐 것이고 메타버스 내의 촉각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가능한 세계라면 더 이상 가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계할 수 있는 현상학적 세계로서 메타버스를 인정해야 하며 그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본 논문에서는 우리 몸의 감각 중에서도 특히 촉각에 주목하여 논지를 전개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모든 감각이 촉각으로 환원됨을 입증하고, 촉각의 우선성, 촉각으로 이루어지는 지각의 우선성에 대하여 밝힐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나온 감각에 대한 텍스트를 중심으로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과 촉각에 관한 과학적 입장들과 연계하여 촉각의 중요성에 대해 밝힐 것이다. 그리고 촉각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토대로 메타버스 내의 촉각의 중요성 및 메타버스가 다양한 촉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장(場)의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할 것이다.
본론
제 1 장
1.1. 에피쿠로스 학파의 감각 이론
고대의 철학자들은 사물들의 원리인 아르케(ἀρχή)를 찾고자 했다. 에피쿠로스의 주된 논증은 자연물을 이루는 제 1 원리는 원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자들의 운동, 충돌, 접촉 등을 통해 사물들이 탄생한다. 당연히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 역시 원자들이다. 또한 이들은 정신과 영혼의 본성 역시 원자라고 밝히고 있는 동시에 신체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정신(animus)과 영혼(anima)를 구분하는데 정신은 이성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이며, 영혼은 감각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감각을 담당하는 부분인 영혼은 우리 몸 전체에 육체의 원자와 섞여 있는 것처럼 퍼져 있으며, 정신과 영혼을 이루는 원자들은 매우 작으며, 매끄럽고 민활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우리 몸이 죽음을 맞으면 영혼을 이루는 원자들 역시 흩어지기 때문에 우리 몸이 사멸해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영혼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힌다. 그것은 각각 숨결, 열 공기 그리고 이름이 없는 요소이다. 영혼의 요소 중 감각을 낳는 요소는 이름이 없으며, 민활하고, 섬세하고, 작고, 매끄럽게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제일 먼저 자극되어 사지를 통해 감각을 나르는 운동들을 부여한다. 자극을 먼저 받고 열과 바람이 다음엔 공기가 운동을 받고 피가 충격을 받은 뒤 살들이 감각으로 꿰뚫리게 된다. 이것으로 감각의 진행 과정을 설명한다. 이러한 네 요소들은 서로 간에 운동으로써 오가고 이들이 결합하는 방식과 네 가지 요소 중 어느 것을 더 많이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 사람과 동물들의 기질 차이가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간에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하는 관계이다. 영혼은 그 자체로 “육체의 보호자”이자 “생존의 원인”이 된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간에 공통의 뿌리들로 붙어 있어 그들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발생할 때부터 함께 태어나 서로 얽혀서 만들어졌다. 육체와 정신의 능력은 분리되지 않으며 영혼이 육체 없이 살거나 육체가 영혼 없이 사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또한 영혼이 육체 없이 감각할 수 없다. 그들의 상호 접촉으로 인한 운동으로 감각이 생겨난다. 육체 자체가 감각을 가지며, 감각기관은 입구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얽혀 감각한다. 영혼은 몸 전체에 퍼져 있으며 그것은 감각의 주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몸에 의해 영혼이 보호받지 못한다면 감각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다.
1.2. 에피쿠로스 학파에서의 촉각과 그 중요성
“마치 귀와 눈과 생명을 방향 잡는 다른 감각들이 그러하듯이. 또 손과 눈, 또는 코가 우리로부터 나뉘어 떨어져서는 감각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에 썩은 채 남듯이, 그처럼 정신도 자체적으로 육체 없이, 사람 자체도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정신의 그릇 같은 것임이 분명해서다.”라고 DRN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감각이 신체에 의존함을 알리고 있으며, 신체 없이는 감각이 이뤄질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감각은 신체에 의존하고 있고, 신체는 감각의 충분조건임을 의미한다.
“감각을 믿을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모든 추론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즉시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 감각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있다. “혀가 생겨난 사건이 연설을 멀리 앞질렀고, 소리가 들리게 되는 것보다 훨씬 전에 귀가 생겨났고, 내 생각으로는 결국 모든 지체가 그것의 활용보다 먼저 있었다.” 언어 이전에 혀가 있고 귀가 있다는 것, 우리의 의식으로 무엇인가 구성하기 이전에 몸이, 감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감각을 우리에게 진리로 향하는 길로써 제시하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모든 감각을 촉각으로 환원시킨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사물들의 원리는 원자이다. 그리고 그 원자 간의 접촉으로 인해 사물들이 생성된다. 감각도 이와 마찬가지로 원자의 접촉으로 인해 감각이 발생한다. 앞서 영혼이 감각의 원인임을 이야기 했다. “영혼은 운동에 의해서 현실화 되는 자신의 가능성 때문에 스스로 감각의 속성을 가지며, 몸과 접촉 또는 관계를 가짐으로 인해 몸에게도 감각을 전달해준다.” 영혼 안에 있는 원자들의 운동으로 인하여 감각이 발생하고 영혼의 원자가 우리의 몸과 접촉하고 관계함으로써 감각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감각하는 과정 역시 접촉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우선 오감 중에서도 시각에 관련된 부분들을 보며 시각의 촉각성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눈들을 때리고 시각을 일깨우는 알갱이들이 보내지는지를 인정하여야 한다.” 여기서 알갱이는 원자를 뜻한다. 이러한 원자들이 눈에 충돌하여 우리는 보이는 것을 감지한다. “모든 사물은 시각을 마주하여 형태와 색채로써 때리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더 많은 공기가 앞에서 밀쳐질수록, 그리고 더 바람이 더 오랫동안 우리 눈을 쓸고 갈수록, 각 사물은 그만큼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때리도록”이나 “쓸고 갈수록”이라는 표현을 통해 시각이 촉각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심지어는 거리감까지 촉각적으로 설명한다. “그 어떤 날카로운 광채든지 자주 눈들을 태운다.” 빛의 원자가 눈과 접촉하여 눈을 태운다고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눈부심을 느끼는 것은 빛에 의한 촉각적 경험 때문이다.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들도 촉각으로 수렴한다. “약쑥이 섞이고 희석되는 것을 곁에서 보고 있노라면, 쓴맛이 와닿는다.” 쓴맛이 와닿는다는 표현을 통해 미각 역시 촉각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것은 청각에서도 다르지 않다. “우선 모든 소리와 음성은 그것들이 귀로 파고들어서 자기들 몸으로써 감각을 때렸을 때, 들리게 된다.” 자기들 몸이라는 것은 소리의 원자들을 의미하고 그것이 감각을 때린다고 표현한다. 청각도 접촉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의 물리적인 접촉으로 감각이 촉각적임을 설명한다.
제 2 장
2.1. 메를로-퐁티의 지각 이론
지각(perception)이란 무엇인가? 철학사에서 지각은 어떤 감각을 감지하는 것으로, 어떠한 감각을 해석하고 인지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지각이란 무엇인가? 그는 지각을 감각기관으로부터 수용된 감각(sensation)과 느낌(sentir)을 일컫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감각과 느낌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 둘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양자는 공존하고 분리 불가하다. 감각과 느낌은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 기관들―예를 들면 눈이나 귀, 촉각을 감지하는 피부―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느낌을 지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의 망막에 어떤 푸른 나무의 상이 비치고 거기에서 받는 어떠한 느낌, 그것이 지각의 과정이다.
앞서 감각과 느낌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순수 인상은 발견될 수조차 없고 지각될 수 없으며 지각의 계기로서 생각될 수 없다.” 오로지 순수한 감각이란 허상일 뿐이다. 감각은 언제나 느낌과 결부되며, 모든 감각들 각각은 느낌으로 전환된다.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 냄새나는 것은 반드시 지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변환된다. 또한 감각에서는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붉은색을 보고 ‘붉은색 일반’을 추상적으로 지각하지 않으며 그 질감에 따라 우리의 주관적 느낌은 달라진다. 이 역시 모든 감각에는 느낌을 수반한다는 것을, 느낌이 동반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감각은 대상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따로 떼어 놓아 생각할 수 없고 세계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순수의식이 그 자체 무엇인지 모르고, 감각기관은 무형의 그릇과 같은 그런 의식의 도구도 아니다.” 감각은 느낌과 분리될 수 없고 나라는 주체에 수용되는 객체가 아니다. 감각은 의식과 세계와의 공생관계를 알린다. 감각은 의식과 세계, 두 가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아무리 그 감각이 단순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관계의 지각이다. 우리의 지각은 우리를 관계하도록, 세계-에로-향하도록 해주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 존재를 관계를 통해서 규명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각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 몸에서 일어난다. 느낀다는 것은 언제나 몸과의 연관성을 맺는 것이며 세계와의 교감이다. 지각의 경험은 바로 주객비분리의 경험이다. 우리 몸과 세계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몸은 생물학적인 몸, 객관적인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고유한 몸(corps propre), 지각의 몸이다. 즉 지각의 차원에서 우리의 고유한 몸과 세계는 비분리적이다. 세계는 나에게 나타난 대로의 그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2. 메를로-퐁티에서의 촉각과 그 중요성
감각에 참과 거짓을 부여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우리 의식의 바탕이 되며, 메를로-퐁티에게 느낌은 우리를 세계-에로 인도하고 타인과의 관계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경험이 우리에게 넘겨주는 대로의 감각은 더 이상 무차별적 질료, 추상적 계기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와 접촉하는 면이고, 의식의 구조이며, 또한 유일한 공간인 대신 모든 성질들의 보편적 조건이다.” 메를로-퐁티는 감각의 위상을 복권하고 있으며 감각을 세계로 향하는 통로이자 타자와의 관계를 열어주는 안내자로 제시하고 있다.
메를로-퐁티 역시 감각의 촉각성을 시사한다. 그의 저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촉각을 공감각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촉각과 시각이 아주 유사한 원인에 의해 발동되어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메를로-퐁티는 이와 유사하게 시각에 대해 “시선에 의한 촉지”임을 밝힌다. 보는 것은, 시각적 경험은 촉각으로 환원된다. “눈에 보이는 광경은 ‘만질 수 있는 성질들’ 보다 더 많이도 아니고 더 적게도 아니게 촉각에 속한다. 우리는 보이는 것은 무엇이나 촉지되는 것 가운데서 재단되었다고, 만질 수 있는 모든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가시성을 약속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우리에게 촉각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시각은 만질 수 있는 공간의 어딘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경이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점이다. 만질 수 있는 것 가운데의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 가운데에 만질 수 있는 것 사이에 서로 교차하는 이중의 방위 측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각 역시 촉각에 수반된다. 시각적인 것이 우리에게 촉각적인 느낌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에피쿠로스와 같이 원자에 의한 ‘접촉’으로 시각적인 것이 촉각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퐁티는 ‘느낌’을 통해 예를 들면 햇살이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시각의 촉각성을 설명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촉각성 사유를 펼친다. 그는 풍경이, 소리가, 냄새 같은 것들이 남긴 느낌이 촉각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 느낌이 우리를 만지는 것이다. “바로 이 진정한 촉각에 의해 ‘만지는 주체’가 만져지는 것의 열로 이행하여 사물들 가운데로 내려가며, 결국 촉각은 세계의 한가운데서, 그리고 사물들 속에서 그렇듯 이루어진다.” 촉각은 우리를 주객비분리의 세계로 이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몸이 두 면을 가진 존재, 한쪽은 사물들 사이의 사물이고, 다른 한쪽은 사물들을 보고 만지는 자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자기 안에 이러한 두 특성을 결합하여 지니고 있다고, ‘객관’의 질서와 ‘주관’의 질서에 속하는 이러한 이중 소속은 우리에게 두 질서 사이의 매우 뜻밖의 관계들을 밝혀 준다고, 이러한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촉각은 일방적인 감각이 아니라 만지는 동시에 만져지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 자체로 관계를 함축한다. “내가 나의 신체의 경험과 감각의 적막에 빠져있다 해도 나의 삶과 세계와의 모든 관계를 없애는 데는 이르지 못한다. 어떤 의도가 나로부터 새로이 용솟음칠 때마다 그것은 내 주위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대상들을 향한 것이거나, 발생하여 내가 방금 체험했던 것을 과거로 밀어내는 순간들을 향한 것이다.” 느낌은 촉각으로 환원되고, 이러한 느낌은 우리에게 세계와 관계하는 통로, 사이-세계, 즉 살(chair)이 된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 자체의 보편성이며, 나 자신의 타고난 익명성이다.
제 3 장
3.1. 에피쿠로스와 메를로-퐁티 이론 간 차이점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육화된 의식(La conscience incarnée)에 체험되는 현상을 기술하는 학문이다. 또한 느낀다는 것은 언제나 신체(몸)와의 연관성을 맺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달리 신체와 결부된 영혼을 통해 감각이 이뤄지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영혼이 감각하는 능력을 갖고, 몸과 영혼을 구성하는 원자 간의 상호 작용으로 인해 우리 몸의 감각 작용을 설명한다. 그러나 영혼 자체만으로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 몸과 결부된 영혼이어야만 감각 작용이 가능하다.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감각을 신뢰하는 것과는 다르게 감각이, 느낌이라는 것이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단계 이전에 놓여 있음을 밝힌다. “내가 지각을 판단의, 행위의, 술어의 질서에 속하는 종합과 같은 것이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각은 선술어적이다, 다시 말해 언어적 표현 이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언제나 감각을 참으로 여기며 감각한 것을 바탕으로 의식을 구성한다. 감각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감각 작용을 영혼으로 설명하는 에피쿠로스와 그렇지 않은메를로-퐁티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하지만 두 철학자 모두 몸을 중요시 한다는 것에서 몸의 위상을 철학적으로 회복하였다. 감각을 신뢰하는 것과 감각을 참과 거짓의 판단 이전의 단계에 놓는 것 역시 차이가 있지만 감각을 무시하던 것이 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에 대해 의의를 갖는다.
제 4 장
4.1. 촉각의 중요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
우리가 촉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에피쿠로스와 메를로-퐁티의 이론을 소개하며 감각의 중요성과 몸의 중요성에 대하여 밝혔다. 감각에 앞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고, 감각을 믿지 않는다면 삶 자체도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촉각은 인간 존재를 타인과 관계하게 하는 것이며, 세계와 이어주는 감각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오래전 지적한 바와 같이, 촉각은 우리에게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기하학과 물리학’은 물론이요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한 개념은 모두 촉감을 토대로 삼는다.” 촉감은 나로 하여금 내 몸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부여하며, 그 느낌을 통해 존재를 확립하게 되고 더 나아가 타자들과 관계하게 한다. 접촉을 통해 다른 생물을 감지할 수 있었으며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드러낸다. 다시 메를로-퐁티로 돌아가서 나의 손은 만지는 동시에 만져지는 것으로서 사물들 사이에 자리 잡으며 만져지는 세계로 열린다.
4.2. 메타버스 내에서의 촉각
메타버스 내에 감각을 구현하는 기술을 실감기술이라고 한다. 실감기술(Immersive Technology)란 인간의 오감을 극대화해 실제와 유사한 경험을 제공하는 차세대 기술이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등 많은 기술들이 상용화되었지만 촉각과 관련한 기술들은 널리 상용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매체와 영화들을 통해 촉각과 관련한 실감기술이 상용화되어 있는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이 대표적이다.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2045년의 미국이다. 가상현실인 오아시스(OASIS)가 등장하여 주인공은 VR슈트를 입고 장갑을 착용한다. 그러한 장치를 통해 주인공은 가상 세계에서 전해지는 감각이 현실 세계의 몸에 물리적으로 작용한다. 이 영화는 가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의 몸이 어떻게 감각하며 촉각을 느끼는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메타버스 기업들과 많은 연구자들이 실감기술 중에서도 촉각과 관련한 분야에 많은 투자와 연구를 하는 것은 가상세계에 몰입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가상세계에 촉각을 부여하게 되면 현실세계와 같은 생동감을 갖게 된다. 시각, 청각, 후각과 같은 감각의 재현만으로는 가상세계는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으로 남게 되며 촉각이 없이는 살아있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촉각이 주는 몰입감뿐만 아니라 앞서도 언급했듯이 촉각은 우리를 관계하게 만드는 감각이다. 주객비분리의 감각이다. 메타버스가 물질세계와 가상현실을 연결하는 사이-세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객비분리적 감각인 촉각이 필요하다. 만질 수 있으며 만져짐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확립하는 동시에 타자의 존재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세계와, 나 아닌 타자와 교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촉각은 가상현실에 몰입할 수 있게 하며 그 안에서 관계할 수 있게 만들고 그곳을 현상학적 세계로 만든다.
현실세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촉각만을 재현하는 것만이 실감기술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메타버스가 차별성을 갖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 또한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존재는 차마 만질 수 없는 더러운 것이라거나, 만질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값비싸고 희귀한 것 혹은 이미 현실 에는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들―멸종한 공룡, 고대의 인간 등―과 신체 내부의 장기들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촉각은 메타버스 밖에서도 안에서도 감각 가능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한 촉각의 경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가치 있을 것이다. 메타버스라는 공간은 가상을 넘어 현실 이상의 경험을 제공해 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나가며
만지고 만져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 존재를 드러내고 타자의 존재를 감지하며 세계를 느낀다. 피부로 느낀다는 것은 나의 의식에 앞서는 동시에 내 의식을 구성하는 바탕 지(知)가 되며,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하며, 나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확립해주는 것이고, 관계하게 하는 것이고 주객비분리의 존재로서 세계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공간은, 내가 느끼고, 내 눈앞에 항상 펼쳐져 있는 이 공간인 세계는 촉각적인 것들로, 살(chair)로 나를 에워싸고 있다. “매순간마다 나의 지각 장은 반영, 으깨지는 소리, 내가 정확하게 지각된 맥락에 연결 지을 수는 없으나, 나의 상상물과 혼동됨이 없이 단숨에 세계에다 자리를 잡아 주고 곧장 사라지는 촉각적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메타버스(Metaverse) 안에서 감각할 수 있다면, 피부로 느낄 수 있다면, 그 세계는 곧장 현상학적 세계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지각의 현상이 펼쳐지는 그러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으로서 그 안에서 존재하고 관계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메타버스 안에서의 감각 경험은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 메타버스는 다양한 감각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서, 초월적인 촉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플랫폼으로서 자리매김 해야 한다. 이제 메타버스는 더 이상 가상세계가 아닌 현상적 세계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감각할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하다. 또한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만큼 새로운 인식론의 발견 및 촉각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담론들을 기대해 본다.
|이당논문상 심사평
1) 논문의 형식이 잘 갖춰져 있음
2) 서론: 첫 번째 단락 “이렇듯 촉각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철학에서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본 논문에서는 철학적으로 촉각의 중요성을 규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촉각이 적용된 메타버스(metaverse)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해 볼 것이다.” 이 문장은 서론 맨 뒤로 보내는 것이 좋다. 또한 서론에서 플라톤의 인용에 관한 각주가 필요하다. 또한 왜 촉각이 철학의 주제가 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더 있었으면 한다.
2) 본문에서 에피쿠로스 들어가기 전에 데모크리토스에 관한 언급이 있으면 좋을 거 같다.
3) 사실 촉각에 관해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는 에피쿠로스와 메를로 퐁티밖에는 거의 없다. 본문에서 필자는 감각 이론의 출발점인 에피쿠로스와 지각 이론의 현대 철학자인 메를로 퐁티의 이론을 잘 설명하고 있다. 다만 3-1에서 두 철학자의 차이점이라기보다, 메를로 퐁티는 개인의 감각 경험을 세계로 더 확장해서 발전시켰다는 점을 강조하면 좋을 거 같다.
4) 철학에서 촉각 이론을 메타버스인 가상세계로 확대 적용 시켰다는 점은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4-2에서처럼 메타버스의 4가지 세계를 비롯, 초실감 메타버스를 위한 촉각 피드백 기술 같은 것에 관한 심도 깊은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은 아쉽다. 또한 촉각에 대한 확장 개념으로 시각 촉각과 같은 공감각과 공간에 대한 촉각 등 여러 각도의 검토가 필요하며, 미래 메타버스에서의 5감 이외의 또 다른 감각이 등장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살펴봐야 할 것이다.
5) 추후에 이 논의를 발전시켜 가상현실에서의 감각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뇌에서만 일어나는 착각에 기초한 것인지, 아니면 메타버스에서의 촉각이 메를로 퐁티의 지각이나 느낌에 대한 학설 이후 다른 철학적 규정을 필요로하는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6) 알베르트 수스만, 서유경 역, <12감각>, 푸른씨앗. 2016 (원제 : Die zwolf Sinne), 샹탈 자케, 정지은, 김종갑 역, <몸 – 하나이고 여럿인 세계에 관하여>, 그린비, 2021, W.J.T. 미첼,마크 B.N. 핸슨, 정연심 외 역, <미디어 비평용어 21>, 미진사, 2015 (원제 : Critical Terms for Media Studies 2010년), 안토니오 다마지오, 임지원, 고현석 역, <느낌의 진화> arte(아르테), 2019, (원제 : The Strange Order of Things: Life, Feeling, and the Making of Cultures 2017년)을 참고하라.
|이당논문상 수상소감
먼저 논문의 작성에 있어서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신 본교 철학과 장미성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직은 철학사에서 감각과 느낌에 대한 논의가 미미하지만 더 많이 조명되길 바라며 다양한 담론의 등장을 기대한다. 본인 또한 논문의 말미에 제기한 인식론의 문제와 촉각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 본 논문을 선정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고 감각과 느낌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철학에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